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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채상우 시인 / 백년모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8.

채상우 시인 / 백년모텔

 

 

 열두 해 전에 헤어졌던 여자가 병이 들어 찾아왔다 오늘은 낮이 가장 긴 날이고 내일은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찾아 머리를 감는 날이다 나는 아직 모른다 낙숫물 소리는 여전히 가난하다 워킹팜은 일 년에 십 센티미터씩 움직인다 그리고는 일 년 전의 뿌리를 미련 없이 잘라 낸다 나는 아직 모른다 동태내장탕을 먹다 보면 삼양동 골목길이 떠오른다 내가 쓴 문장들은 서로를 조금씩 속이려 한다 한번 시작된 생은 멈추지 않는다 그래 인정한다 너는 나보다 조금 덜 미쳤던 거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성교를 끝낸 뒤 슬픔을 느낀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방금 전까진 개였는데 비로소 개가 된 느낌의 느낌이랄까 개로 오십 생을 살고 나면 인간이 된다 나는 아직 모른다 평생을 조롱받으며 사는 덴 딱 하루면 충분했다 오늘을 과연 무슨 요일이라고 말해야 하나 마야인들이 남긴 일력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죽었다 자신을 모욕하는 일은 참 쉬운 일이다 그날 본 꽃의 이름을 나는 아직 이해할 수가 없다 다행이다 나만 나를 증오한 게 아니었다 나는 아직 모른다 모나크나비는 독풀 위에 알을 낳는다 내게 남은 건 머리카락 몇 올이 전부다 손가락이 자꾸 파래진다 벽지 속의 물고기가 화석이 되어 간다 나는 아직 알아서는 안 된다 오늘도 사랑할 사람이 생기려 한다 아직 세지 못한 은전들이 낭려하다 나는 선택했다 내 세월 속에 남기로 나는 모른다 작약을 심었던 마당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모든 길의 끝에는 무덤이 있다 쓰고 버린 이름들을 태운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또 백 년이 시작되는 중이다 나는 결코 모른다 내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름다웠을 여자 다 기억나려 한다 진짜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 나가이 타츠유키(長井龍雲),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라틴 속담; 王家衛, 「一代宗師」

 

 


 

 

채상우 시인 / 별정우체국

 

 

저건 강아지풀이고 저건 참나리고 그래 오늘도 안녕

 

십 년 전에도 그랬듯 작년처럼 저기엔

 

말냉이꽃이 피었더랬는데 애기별꽃은 이미 다 숨었고 개오동나무엔 다시

꽃이 피고 있구나 붉은괭이밥은 여전히 붉은괭이밥이고

 

장미를 심을까 내년엔 파란 장미를

 

내 발톱에서 곰팡이가 피어난다

 

 


 

 

채상우 시인 / 산을 움켜잡고

 

 

 까만 운동복과 가벼운 면 잠바 차림으로 가세 가을 운동회 때 청색 깃발 나부끼며 백기를 누런 땅바닥에다가 꽂기에 어울리는 것이지. 마치 까만 숲속을 헤매다가 소나무 향 짙게 깔린 어느 솔밭에 주저앉고 마는데 나도 모르게 송이버섯 하나쯤은 깔아뭉개듯 까만 운동복 차림은 얼마나 좋은 것인지! 그 높은 산봉우리 향해 조금씩 걸어가는 게 또 얼마나 알맞은 것인지 걸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 못 하지! 내리막길 있으면 오르막길이 있고 오르다가도 솔잎 향에 흠뻑 취하며 저 아래 계곡을 바라보며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얼마나 좋은 것이냐! 그리 먼 곳도 아닌 가까운 산을 움켜잡고 오르기라도 하면 까만 운동복과 가벼운 면 잠바는 껴입고 가야지

 

 


 

 

채상우 시인 / 이십 세기 소년 독본

 

 

 내겐 아름다운 습관이 있지 난 오후 세 시에 허브티를 마셔 아무래도 입이 깨끗해야 하니까 난 저녁마다 혼자 육식을 해야 하거든 그리고 일주일 내내 구애를 하지 그러다가 운 좋게도 홍콩에서 온 아가씨를 만난다면 금붕어를 사줄 거야 어차피 불친절해지겠지만 처음엔 다 아픈 거야 걱정하지 마 금방 아름다워질 테니 젠장 모두 다 아름다운 습관 때문이지 北國에서 팔 년 만에 돌아온 선배는 다시 北國으로 떠난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 만우절 밤에 말야 장국영이 죽었고 거짓말처럼 진심을 말하곤 하던 애인은 한순간에 변심했지 왜 항상 익숙해져야 하는 건 나일까 그래 난 아침마다 상추에 한 컵씩 물을 주고 깻잎의 잎맥을 더듬곤 해 저녁마다 이젠 혼자 육식을 해야 하거든 그리고 내가 저지른 죄악들을 모조리 고백하리라 결심하지 난 아직 용서 받지 못했으니까 난 너무 아름다워져 버렸으니까 시들지 않는 시체는 얼마나 고매한가 아직 저물지 않은 이십 세기 난 한 달 내내 일 년 내내 구애를 하고 육식을 하고 고백할 준비를 하지 내겐 완성해야 할 아름다운 습관이 남아 있으니까

 

 


 

 

채상우 시인 / 마늘까는 여자

 

 

 그 여자 마늘 까는 여자 녹슨 놋쇠대접만한 손으로 궁시렁궁시렁 마늘까는 여자 삼칠일 지나고 하루 지나도록 아무도  그 여자 얼굴 본 적 없다네  던킨도너츠 앞 사거리  횡단보도에 떠억 하니 세워진  덤프 트럭  시푸른 차일 속 비스듬히 돌아 앉아 하루죙일 마늘만 까는 여자 사타구니 쩌억 벌리고 그 안 가득

 

 마늘만 까대는 여자 육쪽마늘 한 접에 오천 원 팻말만 붙여 놓곤 손님이 와도 시큰둥 내다보지도 않는 여자  미어터지도록 깐 마늘 담은 비닐봉지 누가슬쩍 집어 가건 말건 그 여자 무심한 여자 곰 같은 여자 벌써 삼칠일 하고도 하루가 지났건만  아찔한 마늘 냄새 풀풀 날리는 토굴 속 웅크리고 앉아 육차선이 흘러 넘치도록  마늘만 까는 여자  사람들이야 퇴근을 하건 말건 주절주절 또 하루 저물도록 마늘 까는 여자  그 여자 귀신일까  사람일까 귀신은 아닐 거야 마늘 까는 귀신 본 적 있남  아님 정말 곰인가  그래 곰이니까 삼칠일 하고도 하루 지나도록 마늘만 까대지  그러고도 암시렇지도 않지  곰이니까 말야 곰이니까 마늘만 까먹고도 살지 암 그렇고 말고 그렇지 우리

 

엄마니까

 

<시작>' 2003년 가을호 신인상 당선작

 

 


 

채상우 시인

영주 출신. 2003년 계간 《시작》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멜랑 콜리』(천년의시작, 2007)와 『리튬』(천년의시작, 2013)이 있음. 현재 (주)천년의시작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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