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진 시인 / 구근식물
시체들이 동글게 몸을 말고 썩어가는 즐거운 오후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혹성들이 수박처럼 잘 여물어가는 여름입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사람들은 땅으로 꺼질 것 같아서 헐거운 러닝셔츠를 입고 자주 바닥을 흠모합니다 손은 겸손하게 모아진 채 버스에서 자주 졸음을 맞이하고 어서 오시라고, 몸속에 깊이 박혀 있다가 빠진 돌처럼 잠이 뽑혀 나간 자리마다 잡초가 돋습니다 그 안에 누워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든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 꽃피는 일보다 더 아팠습니다 지난 겨울 꽃들이 주르륵 제 몸을 쏟아버리고 간 자리에 들쥐들이 안에 들어가 깊이 박혀 자고 있습니다 때때로 울고, 하늘을 날고, 따뜻한 알을 낳습니다 소용없습니다, 파묻혀 있던 햇살이 삐죽 땅에서 돋아날 때 땅 속에 묻혔던 시체들이 농장의 야채들처럼 익어가고 사타구니 아래에 거대한 구근을 기르는 소와 말들이 죽어서 가죽만 말라붙은 제 몸뚱이를 평화롭게 뜯어먹고 있습니다 잠이 온다, 잠이 자란다, 내 몸에 넓은 이파리를 흔들며 물 먹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둥글게, 둥근 알처럼 새들이 내 몸에 앉았다가 날아갑니다 잠이 나를 오래도록 품고 있다가 세상에 문득 내놓고 나는 너무 눈부시고 당황스러워서 얼렁뚱땅 아무 이름으로나 쉽게 꽃피고 말았습니다
계간 『시산맥』 2020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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