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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금진 시인 / 구근식물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9.

최금진 시인 / 구근식물

 

 

시체들이 동글게 몸을 말고 썩어가는 즐거운 오후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혹성들이 수박처럼 잘 여물어가는 여름입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사람들은 땅으로 꺼질 것 같아서

헐거운 러닝셔츠를 입고 자주 바닥을 흠모합니다

손은 겸손하게 모아진 채 버스에서 자주 졸음을 맞이하고

어서 오시라고, 몸속에 깊이 박혀 있다가 빠진 돌처럼

잠이 뽑혀 나간 자리마다 잡초가 돋습니다

그 안에 누워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든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

꽃피는 일보다 더 아팠습니다

지난 겨울 꽃들이 주르륵 제 몸을 쏟아버리고 간 자리에

들쥐들이 안에 들어가 깊이 박혀 자고 있습니다

때때로 울고, 하늘을 날고, 따뜻한 알을 낳습니다

소용없습니다, 파묻혀 있던 햇살이 삐죽 땅에서 돋아날 때

땅 속에 묻혔던 시체들이 농장의 야채들처럼 익어가고

사타구니 아래에 거대한 구근을 기르는 소와 말들이

죽어서 가죽만 말라붙은 제 몸뚱이를 평화롭게 뜯어먹고 있습니다

잠이 온다, 잠이 자란다, 내 몸에 넓은 이파리를 흔들며

물 먹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둥글게, 둥근 알처럼 새들이 내 몸에 앉았다가 날아갑니다

잠이 나를 오래도록 품고 있다가 세상에 문득 내놓고

나는 너무 눈부시고 당황스러워서

얼렁뚱땅 아무 이름으로나 쉽게 꽃피고 말았습니다

 

계간 『시산맥』 2020년 여름호 발표

 

 


 

최금진 시인

충북 제천에서 출생. 1997년《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창비, 2007), 『황금을 찾아서』(창비, 2011),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창비, 2014)과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쳔년의시작, 2014)이 있음. 2008년 제1회 오장환문학상, 2019년 제 12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등 수상. 동국대, 한양대 등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