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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해람 시인 / 명중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9.

박해람 시인 / 명중

 

 

사내의 울퉁한 팔뚝에

한 시절의 순정이 명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 무엇에다 명중시키기란 쉽지 않다는 것

저 하트 모양에 박혀 있는 화살처럼

깊이 박힌 다음에는 명중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지금은 뒤쪽에서 덜 풀린 힘이 부르르 떨고 있는

여진의 날들이라는 것이지

또한 허공으로 날아간 것들

그 떠난 자리는 흔적이 없다는 것이지

다만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는

누구나 명중되어 있다는 것이지

 

기마족(騎馬族)들에게는 적에게 허점을 보일 때가 화살을 날릴 때란다

그 무엇을 과녁으로 삼을 때가

가장 방해받기 쉬운 때라는 것이지

 

숨 한 번 고르는 시간이

영원히 숨을 끊을 수 있을 때라는 것이지

내 몸이 과녁이 되는 때라는 것이지

 

아직 제대로 된 들숨 한 번 들이마시지 못한 시절인데

명중의 시절이 내게로 와 박히는 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 부르르 떨리는 때가 있다

아직 깨끗한 과녁이 가끔 두렵다

그러나 이 부르르 떨리는 것들, 고통은 늘 뒤쪽에 있다는 것이지

그러다가 더 이상 떨림도 없을 때가

내가 제대로 된 과녁이 되는 때라는 것이지

사내의 울퉁한 팔뚝에 박힌 그 화살처럼

누군가의 마음에서 푸릇하게 사라져간다는 것이지.

 

『문학사상』(2004년 8월호)

 

 


 

박해람 시인

1968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랜덤하우스중앙, 2006)와 『백 리를 기다리는 말』(민음사, 2015)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