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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종연 시인(합천) / 가로등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9.

김종연 시인(합천) / 가로등

 

 

고속도로를 달리던 새벽녘

졸음에 겨운 남편이 갓길에 차를 세우고

토막 잠을 청한다

무심코 차창 밖 가로등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지쳐 보인다

굽어있는 어깨가 40대 가장 같다

 

'이번 여름휴가 지나면 1000명을 짜른대'

그 소문에 소도시가 출렁댄다

아내들은 세금고지서, 아이들 학원비, 카드 대금

그런 일상을 꿰느라 남편의 날 선 마음 읽지 못하고

언제나 왕자,공주로 자란 아이들은

아버지의 낯빛 따윈 관심도 없다

 

그믐밤이든 보름밥이든 꾀부린 적 없는데

충혈된 그 눈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없었다

 

파리해진 어깨 너머

아침이 오고 있다

 

그들을 이끌어 줄 희망의 빛

어디 숨어있나?

 

 


 

 

김종연 시인(합천) / 가마가 운다

 

 

살기 위해 쏟아내는 비명은 닮아 있다

가마의 불꽃들이 어미의 산고처럼

산산이 터질 수 없어 뱉어내는 저 울음

 

몸의 진자운동이 그들을 읽는 시간

지진의 전조처럼 땅이 울고 산이 운다

숨으로 오는 것들은 막아낼 재간이 없다

 

<시조미학 2021. 가을호>

 

 


 

 

김종연 시인(합천) / 아프리카 부처님

 

 

볕에 탄 얼굴에서 아프리카를 떠올리고 뜻 모를 염불 소리에서 부처님을 떠올린 여덟 살 아이의 상상력이 탄생시킨 그 남자

팔순의 아버지 대신 들녘의 보모였던 그 남자의 일요일엔 휴식이 없었다. 물길을 열고 닫으며 생명을 키워냈다.

노부가 떠난 뒤에도 그의 삶은 그대로다 일과를 마친 후 합장의 시간은 늘고 아이는 청년이 됐다 들을 닮아 푸르른

 

- 시집 '아프리카 부처님, 알토란북스, 2021

 

 


 

 

김종연 시인(합천) / 특강요청

 

 

바람의 날갯짓을

몸에 지닌 당신이

 

송곳 하나 꽂지 못하는

계단 틈 여윈 곳에

 

꽃잎을 틔운 사연을 청해 듣고 싶습니다

 

-『아프리카 부처님 』 알토란북스 2021.

 

 


 

 

김종연 시인(합천) / 거미줄

 

 

공치는 날 다반산데 비 오는 날 또 다반사

 

우의 없이 알몸으로 허공을 잇대보지만

 

빗물만 오종종 맺혀 눈물처럼 글썽인다

 

 


 

 

김종연 시인(합천) / 언양읍성

 

 

군데군데 찢겨나간 낡은 소설책처럼

줄거리 툭, 툭 끊긴 빛바랜 이야기가

전기수 서설을 풀듯 사람들을 붙든다

 

시간의 걸음 쫓다 제 빛을 잃었지만

은유와 상징으로 경계를 지켰다.

언젠가 일어서리라 숨결 꼬옥 붙든 채

 

영화루 처마 끝에 보름달이 걸리고

옛 성벽 자연석들 이야기보따리 풀면

해자도 물길을 열고 밤새 귀를 세운다

 

 


 

 

김종연 시인(합천) / 풋,

 

 

두 주먹 불끈 쥔다 알곡이 되겠노라

 

"명문대 못 나오고 스펙도 부족하네요."

 

이력서 내밀 때마다 쭉정이가 되어 간다

 

 


 

 

김종연 시인(합천) / 아라홍연

 

 

그림 속 정물처럼 칠백 년을 살았습니다

그댈 부른 손짓 몸짓 메아리로 돌아오면

엇박자 연기 되어서 눈물 달고 선 하루

 

십 년만, 아니 백 년만 당신 기다릴 테야

하루에도 수천 번 접은 마음 허물어지고

오감을 여닫은 자리 멍울진 바람希들만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의미가 되고 싶다

시간을 넘고 넘어온 주문이 된 기도 한 줄

천지가 숨을 참는다. 늦은 응답 미안해서

 

 


 

 

김종연 시인(합천) / 동행

 

 

너는 한 방울 물로 자라나는 종유석

 

석순처럼 말없이 나는 기다리고

 

그 모습 지켜보느라 세상도 슬로모션

 

 


 

 

김종연 시인(합천) / 가덕도 로슬린

 

 

담이 높아질수록 바람은 키를 세운다

기도가 되지 못한 속엣말은 까칠해지고

여섯 살 어린 아들은 파도를 밀고 있다

 

"필리핀 가지 말고 아이랑 여서 살아줘"

산에 누운 남편의 나뭇잎 연서 한 장

답신의 메아리 속에 적지 못한 안부만

 

"현우 잘 키울게요" 그 뜨건 언약으로

빛 잘 드는 마당가 무궁화를 심는다

볼우물 깊은 얼굴로 소인 찍는 로슬린

 

 


 

 

김종연 시인(합천) / 분꽃 엄마

 

 

 

꽃잎을 접고 누운 요양병원 긴 하루

나 여기, 살아 있다고 한번쯤 다녀가라고

 

 


 

김종연 시인(합천)

경남 합천에서 출생. 2010년 <나래시조> 시인상으로 등단. 2017년 올해의 단시조 대상을 받았고 시조집 ‘분꽃엄마’를 발간했다. 운문시대 동인. 한국시조협회. 울산시조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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