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 시인 / 물꽃
비 오는 날 호수에 물꽃 핀다 수직으로 빗방울은 떨어져 수면에 동심원을 그린다 수평으로 잔잔히 퍼지는 물무늬 세모시처럼 가늘고 고운 저 아름다운 적막의 동그라미 속, 누대의 시간 흐른다 소란과 수다에 지쳐 두꺼워진 몸 가누고 싶다 그리하면 한지처럼 얇아져 녹아서 형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지은 죄가 많아 선한 것이 눈에 불편한 사람 물꽃은 뿌리 없으니 고통도 없을 것이다 졌다 피고 피었다 지는 경이 순간의 삼매경, 차마 어지러워서 땀에 전 작업복처럼 무거운 내 오후의 생 비틀거리며 흠뻑 젖는다
이재무 시인 / 돌
모름지기 시인이란 연민할 것을 연민할 줄 알아야 한다 과장된 엄살과 비명으로 가득 찬 페이지를 덮고 새벽 세 시 어둠이 소복이 쌓인 적막의 거리 걷는다 잠 달아난 눈 침침하다 산다는 일의 수고를 접고 살(肉) 밖으로 아우성치던 피의 욕망을 재우고 지금은 다만, 순한 짐승으로 돌아가 고른 숨소리가 평화로운 내 정다운 이웃들이여, 누구나 저마다의 간절한 사연 없이 함부로 죄를 살았겠는가 머리에 이슬 내리도록 노니다가 발부리에 걸리는 돌 하나 집어 주머니에 넣는다
'문학 판' 2003년 겨울호
이재무 시인 / 공터 3
어둠이 졸졸졸 고이는 공터 구석에 널브러진 페타이어 속도의 중력에 실려 살아왔던 한 생애의 최후를 나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달려왔을 그 많은 길과 일별했던 풍경들을 그는 기억하고 있을까 누구에게나 한때 생의 절정은 있는 법이다 속도란 마약과도 같은 것 망가지고 부서져 저렇듯 버려져서야 실감되는 무형의 폭력인 것이다 가속의 쾌감에 전률했던 날들은 짧고 길고 지루한 남루의 시간 견디는 그대 생의 종착 생은 언제나 돌이킬 수 없을 때에야 깨달음을 준다
이재무 시인 / 외지에서
소래포구에서 송도 쪽으로 난 철길 따라 걷는다 작년 여름에도 나는 이 길을 걷고 있었던가 그때, 그리움의 새 아직, 가슴의 둥지 떠나지 않고 있었다 기차가 오지 않은 녹스는 철도 유월의 올이 굵은 햇살 강하게 부딪혀 와도 반짝이지 않는다 침묵의 저 완강한 검은 얼굴이 나는 낮설지 않다 습기 품은 낮고 축축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때마다 잡풀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게으르게 흔들린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저 잡풀들의 숨겨진 캄캄한 식욕을 저들은 언젠가 우울과 권태, 그리고 마침내 이 녹슨 철도까지를 삼켜 저들의 영토 넓혀가리라 저들은 한때 우리들 생의 용기였고 구원이었다 그러나 나는 저 잡풀들의 식탐이, 절망과 패배 모르는, 악착같은, 생의 집착이 싫어졌다 무료하게 누워 있는 두 줄의 적색 선로 저들에게도 광휘로 빛나던 날이 있었다 그러나 하얗게 반짝이며, 수많은 승객과 화물을 실은 기차의 중압 보람으로 견뎠던 날들은 지나갔다 지금은 다만 외지에서 조용히 누워 소멸의 긴 시간 보내고 있을 뿐이다 오지, 않는, 기차,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 녹스는 철길 따라 웃자란 잡풀 짓이기며 나는 걷는다 진흙이 달라붙어 발걸음이 무겁다 아무래도 송도까지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재무 시인 / 초상
초저녁 붐비던 소란이 가라앉고, 밤 깊자 마당 한구석 일렁이던 화톳불도 사그라들었다 허물어진 담장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 받아 지푸라기에 매달린 살얼음이 반짝거렸다 울다 지친 나이 어린 상주가 깜박 졸고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인의 영정 누군가 떨어진 술을 사러 논밭 가로질러 마을을 빠져나갔다 향불이 타오르는 탁자 밑 문상객이 놓고 간 지전 봉투가 어지러웠다 살다 보면 죽음이 삶을 위로하는 때도 있다고 부엉이가 상주 대신 밤을 울었다
이재무 시인 / 라면을 끓이다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 주방에 간다 입다문 사기그릇들 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훨씬 더 큰 놈들이다 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 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 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 요란하다 한 여름 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 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 숨어 있다 어제 들른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 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 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 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세 표정을 바꿔 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이다 저 급격한 표정 변화는 우리 시대의 슬픈 기표다 얼마 후 나는 저 비굴 한 사발로 허겁지겁 배를 채울 것이다 도마 위 양파, 호박, 파 등속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칼을 집는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자다 그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롭다 그는 세상을 나누기 위해 나타난 자인 것이다 놓여진 것들을 다 자르고도 성이 안찬 노여운 그는 늦은 밤을 이기지 못한 내 불결한 식욕을, 지난한 허기의 관성을 푹 찔러올는지 모른다 냄비 속 부글부글 끓는 것은 그러므로 라면만은 아닌 것이다
제19회 「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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