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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상국 시인 / 아침 시장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9.

이상국 시인 / 아침 시장

 

 

 화장을 곱게 한 닭집 여자가 닭들을 좌판 위에 진열하고 있다. 발가벗은 것들을 벌렁 잦혀놓아도 그들은 별로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다. 그 옆 반찬가게집 주인은 두 무릎을 공손히 꿇고 앉아 김을 접는다. 꼭 예배당에 온 사람 같다. 어느 촌에서 조반이나 자시고 나왔는지 장바닥 목 좋은 곳 깔고 앉으려고 일찍도 나온 할머니가 나생이와 쪽파 뿌리를 손주 머리 빗겨주듯 빗어 단을 묶는다. 각을 뜬지 얼마 안 돼 아직 근육이 퍼들쩍거리는 돼지고기를 가득 싣고 가는 리어커를 피하며 출근길의 아가씨가 기겁을 하자 무슨 씹이 어떻다고 씨부렁거리는 리어커꾼의 털모자에서 무럭무럭 김이 솟는다. 아직 봄이 이른데 딸기 빛깔이 꼭 칠한 것처럼 곱다. 순대국밥집 앞의 시멘트바닥에 잘생긴 소머리 하나가 새벽잠을 자다가 끌려나왔는지 꿈꾸는 표정으로 면도를 하고 있다. 갑자기 골목 안이 화안해지며 차 배달 갔다 오는 미로다방 아가씨가 어묵가게 아저씨를 향하여 엉덩이를 힘차게 흔들며 지나간다.

 

 


 

 

이상국 시인 / 똬리 다섯 개

 

 

 배다리 솔밭 살던 장수 아버지 별명이 똬리 다섯 개, 아잇적부터 물건이 하도 커 거짓말 좀 보태면 홍두깨만해서 물동이 이는 똬리 다섯 개를 걸어도 끄떡없었다. 이게 수캐처럼 처녀 과부 안 가리고 밤낮 없이 껄떡거리는 바람에 사람 축에도 못 들고 몰매똥매 숱해 맞았다. 어느 해 봄 이웃집 닭에다 그 짓을 했다고 온 동네가 수군거리자 장수 할아버지 아예 뒈지라고 뒤란 도라무깡에 엎어놓고 집채 만한 돌로 눌러놓았는데 밤이 되자 땅 파고 기어나와 또 과붓집을 기웃거렸다는 장수 아버지,

 

 올 봄 저 세상 가며 그 좋은 물건도 가지고 갔다.

 

 


 

 

이상국 시인 / 오길 잘했다

 

 

 어느 날 저녁 동네 골목길을 지나다가 자지러질 듯 우는 갓난애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 누군가 새로 왔구나

 그리고 저것이 이제 나와 같은 별을 탔구나 하는 즐거움

 

상당히 이름이 나있는 시인의 시를 읽다가 야, 이 정도면... 어쩌고 하는 이 희떠움

 

티브이 속에서 줄줄이 끌려가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꼴좋다 꼴좋다 외치는 즐거움

 

아무 생각없이 생을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쓰다가

남 모르게 우주의 창고를 열어보는 이 든든함

 

때로 따뜻한 여자 속에서 내 그것이 죽어가는 즐거움

 

친구를 문상 가서 웃고 떠들다가 언젠가 저것들이 내 주검 앞에서 나를 흉보며

내 음식을 축내는 즐거움을 미리 보는 즐거움

 

어쩌다 공돈이 생긴 날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집에 가는데

나무 이파리들이 멋도 모르고 바람에 뒤집어지는 걸 바라보며

아무래도 세상에 오길 잘했다는 이 즐거움

 

 


 

 

이상국 시인 / 기러기 가족

 

 

- 아버지 송지호에서 좀 쉬었다 가요

 

- 시베리아는 멀다

 

-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이상국 시인 / 남대천으로 가는 길 1

 

 

연어처럼 등때기 푸른 아이들이

물가로 나와

엉덩짝에 풀물을 들이거나

물수제비를 띄우며

그립다고 떠드는 소리를

물소리가 얼른 들쳐업고 간다

 

집 떠나 오래 된 이들도

물소리 들으면

새처럼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저녁

 

풀이파리 끝 이슬등마다

환하게 불이 켜지고

어디서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들린다

 

 


 

 

이상국 시인 / 겨울 선운사에서

 

 

누가 같이 자자 그랬는지

뾰로통하게 토라진 동백은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절 아래 레지도 없는 찻집

담벼락에서 오줌을 누는데

분홍색 브래지어 하나 울타리에 걸려 있다

 

저 젖가슴은 어디서 겨울을 나고 있는지

 

중 하나가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고해(苦海)만한 절마당을 건너가는 저녁

 

나도 굵은 체크무늬 목도리를 하고

남이 다 살고 간 세상을 건너가네

 

 


 

 

이상국 시인 / 달이 자꾸 따라와요

 

 

어린 자식 앞세우고

아버지 제사 보러 가는 길

 

--- 아버지 달이 자꾸 따라와요

--- 내버려둬라

    달이 심심한 모양이다

 

우리 부자가 천방둑 은사시나무 이파리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솨르르솨르르 몸 씻어내는 소리 밟으며 쇠똥냄새 구수한 판길이 아저씨네 마당을 지나 옛 이발소집 담을 돌아가는데

 

아버짓적 그 달이 아직 따라오고 있었다

 

 


 

이상국 시인

1946년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 1976년 《심상》에 시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동해별곡』(1985),  『내일로 가는 소』(1989), 『우리는 읍으로 간다』(1992), 『집은 아직  따뜻하다』(1998),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2005), 『뿔을 적시며』(2012) 등이 있음. 백석문학상 · 민족예술상 · 유심작품상, 2014. 제19회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 유심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