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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철규 시인 / 폭우 지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9.

신철규 시인 / 폭우 지난

 

 

나는 지은 죄와 지을 죄를 고백했다

너무나 분명한 신에게

 

빗줄기의 저항 때문에,

노면을 가득 메운 빗물의 저항 때문에,

핸들이 이리저리 꺾인다

지워진 차선 위에서 차는 비틀거리고

 

빗소리가, 비가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차 안을, 메뚜기 떼처럼, 가득 메웠다

내 가슴을 메뚜기들이 뜯어먹고 있다

 

뻑뻑한 눈

비틀거리는 비

폭풍우를 뚫고 가는 나비처럼

바닥에 떨어져 젖은 날개를 퍼덕이는 몸부림처럼

 

목에 숨이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찬 숨이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 분명한 신

너무나 많은 숨

 

이미 울고 있었지만 울고 싶었다

이미 살아 있었지만 살고 싶었다

이미 죽었지만 죽고 싶었다

 

운전석 천장에 물방울이 맺힌다

추위에 몸이 떨린다

 

컴컴한 방, 손전등을 입에 물고 두 손으로 비밀 금고의 다이얼을 돌리는 도둑처럼 앞으로 전진

 

다 쏟아내야 끝나는 것이 있다

너무나 분명했던 신이 보이지 않는다

 

계간 『문파』 2021년 가을호 발표

 

 

 


 

 

신철규 시인 / 그을린 밤

 

 

표면이 거친 종이 위에 펜촉으로 그은 선처럼

번개가 어두운 하늘에 뿌리를 내린다

지상까지 닿지 못하는

실패한 직선들

어둠의 부정교합

쏟아놓은 내장 같은 먹장구름들

 

살아 있는 나무에 죽은 잎이 매달려 있다

옅은 갈색의 말라비틀어진 잎들

썩기 전에 짙어지는 것들

 

안압이 팽창한다

노란 알약 같은 가로등

탁한 분진들이 넘실대고 있다

 

유리창 속에 일그러진 구름이 있다

핏속을 돌고 있던 가시가 살을 뚫고 나올 것 같다

 

굴뚝에서 매개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근육질의 구름이다

굴뚝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고 싶다

 

또 비가 온다

흐린 꿈속처럼

처음에 한두 방울 내리다가 느닷없이 쏟아지는 비

 

모든 시작은 흐릿하고

마지막 결정은 분명하다

 

곧은 직선으로 올라가던 담배 연기가

구불텅 휘어지면서 흩어질 때

울음의 거미줄이 얼굴에 내려앉는다.

 

발성 기관이 없는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거리며 우는 사람

밤의 수문이 열리고 어둠이 쏟아져 들어오면

 

계간 『동리목월』 2021년 봄호 발표

 

 


 

신철규 시인

1980년 경남 거창 고제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 2017)가 있음. 2019년 제37회 신동엽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