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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종천 시인 / 피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8.

최종천 시인 / 피로

 

 

내 손가락을 정성스럽게 핥고 있는 개에게는

나의 피로가 먹이가 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나의 피로는 이 손가락을 통하여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등골이 저려오는 이 느낌을 나는

어느 거대한 교회의

목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와도

바꾸지 않겠다.

눈의 피로를 보상하는 푸르른 하늘과

눈의 피로를 더하는 빨간 산소 불꽃 사이에서

피로를 모르는 개야

나를 짖게 해다오

물이 피곤하다고 한다.

흙이 피곤하다고 한다.

공기도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기계처럼 피로를 모르고

자동화되어가는 인간이

나는 도무지 두렵구나.

 

『고양이의 마술』,최종천, 실천문학사, 2011년

 

 


 

 

최종천 시인 / 일 죽이기

 

 

일 죽이는 것 한 가지로 사는 것이 노동자다.

모든 건축물과 문화재가 다 일의 시체다. 일의 시체,

시체를 뜯어 먹고사는 존재에게만 허락된 것들

추상적, 구체적, 상징적, 전쟁처럼

불꽃이 튀는 사유와 미친 짓들

수천 년을 죽였는데도 여전히 죽여야 할 일이 있다.

오늘은 망치 대신 파리채나 들고

인간의 목적은 자연의 힘에 대한

인간의 지배에 있다고 한 데카르트를 위해

공간에 좌표를 그리는 파리나 잡아 죽이자.

이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얻었으니

그간 죽여놓은 시체를 살려내자.

오늘은 금속노조 동맹파업 첫날이다.

이제부터라도 살리는 일을 시작하자.

내 몸에 누적된 피로부터 풀고 보자.

일을 죽일 것이 아니라 살리자.

자연은 저절로 살아날 것이다.

내가 덤으로 살 것이다.

 

『고양이의 마술』,최종천, 실천문학사, 2011년,

 

 


 

최종천 시인

1954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과 1988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눈물은 푸르다』(시와시학사, 2002)와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창비, 2007)와 산문집 『노동과 예술』(푸른사상, 2013)이 있음. 2002년 신동엽 창작상과 2012년 오장환 문학상, 2011년 최우수 도서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