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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미린 시인 / 살색*의 살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1.

안미린 시인 / 살색*의 살구

 

 

잃어버려도 흐르는 단어들은

새벽에 배웠던 욕설

 

새벽에 배웠던 목욕은

새벽의 결벽

색깔과 빛깔을 구분했을 때

물 밖으로 나온 내 어깨의 빛

 

물감에 머리를 감아봤던 날

살구색은 부드럽고 충분했는데

오래된 색연필을 해치우려고

긴 색깔들을 부러뜨렸고

무독성의 보색들은 삼켜버렸고

맨 어깨가 차가워질 때

필요한 건 내 살색의 담요

빛바랜 건 내 담요의 살색

빛나는 건 내 산색의 살빛**

 

연이어 태어난 새끼들이 덩어리지고

맨 밑의 동물부터 눈을 뜨는 것 같은

흑인 여자애 같은

색깔들은 너무 긴 설명이 이름인 것들

 

완전한 정의들이 완벽해질 때

살색의 살구들이 살굿빛일 때

 

무너진 건 내 살색의 살색

감싸온 건 내 살빛의

살결

 

• 살색 : 살구색의 잘못된 표현

• • 살빛 : 피부색, 살갗의 빛깔

 

 


 

 

안미린 시인 / 층

 

 

마른 입술이 붙은 순간

층층

 

아랫입술을 깨물고 싶어

나는 나를 깨물고 싶어

너와 내가 입 맞춘다면

너와 나의 입 모양

얇, 이 되고

엷, 이 되어

적신다는 것,

내 눈알과

네 눈알의 감촉이라면

물속에서 눈을 뜨고 물을 본다면

왼손이 둘이 된다면

글씨체를 흘리는 연습을 하고

코뿔소를 흉내 내려고 장미 가시를 코에 붙이는

가벼운 골격,

엉덩이와 궁둥이를 구분하면서

윗입술을 입술로 잡아당기며

나는 말랑함.

우리는 피를 나누지 않고

입술로 이루는 부드러운 건축,

온몸으로 눈을 감을 때

온몸으로 문을 닫을 때

신의 모든 이미지들은

뼈의 깨끗함.

 

 


 

 

안미린 시인 / 서 있는 새

 

 

시계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시간이 시계 위에 서 있는 게 보여

건드리면 열심히 울어 주는 인형은

사실상 녹음할 수 있는 니능이었어

 

서 있는 새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가면을 쓰고 가면의 뒷면을 봤어

날고 싶은 새는 무엇일까

의심하면 뿔로 걷는 동물

날 수 없는 새는 공기의 내장

날 수 있는 새는 이틀 후 다른 종으로 밝혀질 테고

날개를 눈처럼 뭉친 새들은

주먹을 품으려고 알을 버렸어

사라지는 알을 미래로 미루고

차가운 주먹 속에 숨겨 쥔 엄지

오래오래 망설이는 복수처럼

팔꿈치로 빻은 경계들, 오늘들

 

내 날개를 열고 내가 들어갈 수 있을까

날고 있는 새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안미린 시인 / 사실 거짓말

 

 

사실은 거짓말

우주에서 돌아와 이상해진 생물들에 대해선

등껍질에서 나온 적 없는 동물의 등껍질에 대해선

토끼가 형광이 되는 침착하고 침착한 과정

내가 나를 주물렀을 때 동시에 느껴지는 감각

우산과 양산을 쓰고 듣는 빗소리의 차이는 없고

흑백 사진일수록 감은 눈일수록 타는 냄새가 다를 텐데

거짓말은 사실

우주에서 임신에 성공한 나데즈다*의 삭제된 기록

너무 반짝이는 검정들은 인형의 눈으로 쓰일 단추를

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은 161개의 단어였는데

네 질문의 답은 문과 벽이 나란해지는 시간

또 다른 질문의 답은 흑백 사진의 뒷면

저 멀리 색깔 있는 것들이 태어났을 때, 12시가 펼쳐졌을 때

저것 봐, 무서운 사람이 12시를 무서워한다.

 

* 암컷 바퀴벌레, 2007년 최초로 우주에서 임신에 성공했다.

 

 


 

안미린 (安美鱗) 시인

1980년 서울에서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첫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