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일 시인 / 동쪽 버드나무 아래에서
세상을 뒤집어 놓을 듯 비가 내린다 떠내려가는 거울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무가 뿌리째 절규하며 비가 내린다 떠내려가는 그릇이 없었으면 좋겠다
강물이 안으로 흐느끼게 비가 내린다 떠내려가는 신발이 없었으면 좋겠다
가로등이 물구나무서서 비가 내린다 떠내려가는 촛불이 없었으면 좋겠다
귀먹은 창문이 막막하게 비가 내린다 떠내려가는 종소리가 없었으면 좋겠다
하재일 시인 / 연기(煙氣)
죽을 때 바닥으로 기려고 하지 마 온몸을 해체해서 곧장 구름에 올라타
끝없이 계단을 밟다 숨을 헐떡거려도 사방팔방으로 나풀나풀 먼지를 옮겨
종이를 챙겨서 데려가려 하지 마 가랑잎 한 장 그리고 싶지 않아
들판에 머리 숙이지 말고 몸을 맡겨 눈물만 왈칵 쏟는 결말은 없어
검은 흙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마 한 건의 건물도 남길 필요가 없어
평소 덮다가 버린 서책 몇 권 아궁이에 확 던지고 가 버리면 돼
죽을 때 위로 가라앉으려고 하지 마 너는 다시는 별에게 돌아갈 수 없어
하재일 시인 / 사막에서 사는 법
나는 절망을 차단하기 위해 꼬리로 우산을 만들어 쓰기도 해요 우기인데 가뭄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코끝에서 나오는 샘물을 떠서, 코밑 수로를 통하여 몸으로 들여보내고 눈썹을 방패 삼아 모래를 견디기도 합니다
나는 딱정벌레의 운명에서 수분과 내일을 충전합니다
내가 가꾼 한 그루의 나무를 지키기 위해 전의에 불타는 나뭇잎을 오려 붙이고 태양의 흑점을 향해 총구를 겨눕니다
경전이 마르지 않는 낙타를 타고 갑니다 지도에서 지워진 옛 성터를 찾아갑니다
하마터면 비만(肥滿)으로 살 뻔했습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동수 시인 / 그래스 트리 외 1편 (0) | 2022.07.07 |
---|---|
김왕노 시인 / 바그다드에서 하룻밤 (0) | 2022.07.07 |
안효희 시인 / 너를 사랑하는 힘 외 2편 (0) | 2022.07.07 |
한명원 시인 / 구석이라는 곳 외 1편 (0) | 2022.07.07 |
안명옥 시인 / 대못을 빼고 (0) | 2022.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