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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명원 시인 / 구석이라는 곳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7.

한명원 시인 / 구석이라는 곳

 

 

모퉁이가 모퉁이를 만나 아침과 석양이 될 때 구석은 생겨납니다. 아이들이 그곳에 가서 앉으면 물방울이 똑똑 떨어 지기도 합니다. 구석은 모퉁이 저쪽이 궁금해 웅크리고 앉아 훔쳐보면 모퉁이 저쪽도 이쪽과 같은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퉁이에게 사육당하는 것들을 보면 웅크리고 있는 내부가 보입니다

 

새들의 알에는 구석이 없지만 발과 부리의 위치가 있어 가끔 따끔거리는 곳을 구석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구석은 굴러다니는 소리를 밟으며 자랍니다. 밀리고 밀리다 구석이 되는 것들은 온몸이 발이 되기도 합니다. 구석을 깨고 나온 것들은 손이 없고 하얗게 터지는 물살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 피어오르는 구름은 푹신하고 차갑습니다

 

아이야, 크레파스를 가져다 흰색으로 모퉁이를 좀 칠해봐. 빗자루로 모퉁이를 쓸어 노을 속으로 넣어 보렴. 아니야, 몽둥이로 힘껏 내리쳐 봐. 차라리 흙으로 덮어 버려. 힘센 망아지에게 모퉁이를 끌고 가라고 채찍질을 좀 해 봐

 

모퉁이가 없어지면 이쪽과 저쪽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구석들은 평행선 위에 모두 서 있겠지요. 구석은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 어둠이 몰려나오는 곳입니다. 구석은 하품 이 나오고 눈이 감겨집니다. 밤에 안겨 새근거리는 잠이 됩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세요. 구석의 숨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시집 거절하는 몇 가지 방법』 (실천문학, 2019)

 

 


 

 

한명원 시인 / 120,000km + 1.2m

 

 

인류는 어느 날부터

신체적 진화가 시작되었다

귀와 목을 연결하는 색깔의 핏줄들

양쪽 귀에 귀걸이처럼 부착하고,

인간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귓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128비트의 피

120,000km를 돌며 고요의 내부를

지구 밖으로 밀어 버린 듯

힘이 솟고 맥박이 뛰고 심장이 부풀어 올라

눈물이 나고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그것은 가끔 꿈속까지 연결되어

캄캄한 곳을 돌며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실어 오기도 한다

눈을 뜨면 별이 사라지기라도

저 핏줄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듯

주위를 살피고 또 살핀다.

입술을 타고 손까지 흘러넘친 리듬은

손가락 끝으로 빠져나와 사방으로 튄다

128피트의 피는 태초의 말씀

인류 아래 저토록 전지전능한 말들은 없었다

-이 말들의 혈압은 곧 나의 피니

-너희는 모두 이것을 귀로 마셔라

이미 인간은 새로운 핏줄의 식민지

이것은 새로운 인종의 출현을 실천하고 있다

사람들의 두 손에 절대자의

행성 하나가 놓여 있다

 

* 120,000km + 1.2m = 혈관의 길이 + 이어폰 길이

 

시집 '거절하는 몇 가지 방법』 (실천문학, 2019)

 

 


 

한명원 시인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시집으로 『거절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음.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202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현재 기업체 인문학 강사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