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 시인(서산) / 웅덩이
비 그친 흙탕물이 하루가 지나 깨끗하게 떠올랐다
떠돌던 흙이 그 아래 곱게 가라앉았다
한 세상 분탕질로 살았던 사람들 죽을 땐 저렇게 맑게 가라앉는다지 파란 하늘이 그 위에 스며들 만큼 깨끗해진다지
그 웅덩이 속 첨벙대는 사람 하나 곱게 떠오를 수 있을까
이경호 시인(서산) / 비탈
비탈은 겨울을 그리며 비탈은 따뜻할 때엔 아닌 척 비탈은 바람을 들어 껴안고 놀다가 비탈은 이름도 없이 살다가 비탈은 겨울이 되어야 서서히 일어나 비탈은 눈이 내리면 비탈임을 깨닫고 비탈은 절벽에서도 피하지 않고 비탈은 바람을 칼 삼아 제 몸을 찔러 비탈은 피를 흘리며 바람을 삼키고 비탈은 비로소 비탈이 되며 비탈은 갈기를 세우고 비탈은 밤새도록 창가에 날을 들이대다가 비탈은 서슬에 겸손해진 자들만 통과시키고 비탈은 누구에게는 언제나 비탈로 남아 있다
이경호 시인(서산) / 돌담부처
밭의 주인은 돌이었다 낮게 엎드렸던 돌은 흙이 되기로 작정하였다 냉이 민들레 쑥을 위하여 제 가슴을 내주면서 흙처럼 부드럽게 살고 싶었다 어느 날 돌들은 가장자리로 내던져져 돌담이 되었다 아무것도 품을 수 없게 된 돌들은 한동안 삐걱거리며 무너지기 일쑤였다 가슴에 바람이 들어앉았다 우는 일이 일이었다 울다 지친 어느 날 돌은 보았다 예전 자기가 있던 자리에 더 많은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것을 눈물은 마르기 시작했고 가슴은 벅차올랐다 바람을 막아주면서 밭을 지키는 것으로 족했다 돌은 오래도록 그렇게 또 살았다 벌거벗은 채로도 좋았다 작년 그러께부터 돌담에도 풀씨가 날아와 둥지를 틀었고 담쟁이 넌출도 맡겨오기 시작하였다
이경호 시인(서산) / 봄
기러기를 따라온 나그네가 살구꽃 산복숭아꽃 산수유꽃을 판다고해서 찾아갔다 산수유꽃을 사서 아이에게 줬더니 입이 커졌다 아내가 좋아하는 매화는 없다하여 벚꽃을 사주었다 소녀처럼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나그네는 입담이 아주 좋았다 침을 튀겨가며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그칠 줄을 몰랐다 언젠가는 하룻밤 함께 지샌 적 있는데 아침엔 꽃을 다 팔았다며 떠나겠다고 하였다 그 많은 꽃을 누가 샀나 일일이 물어보기도 뭐하고 그를 배웅하며 둘러보기로 하였는데 자두꽃은 고모가 샀고 사과꽃은 이장이 샀고 개나리 진달래는 안 산 집이 없고 나그네는 장사 한번 잘 됐다고 초록꽃병을 덤으로 주고 떠나갔다
이경호 시인(서산) / 서산마애삼존불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날이면 골짜기 하나 먹고 싶어진다 알면서도 모든 사연 폭포에 묻고 모르는 척 하늘을 여백으로 둘 줄 아는 풍경 하나 먹고 싶어진다 느티와 붉나무가 언제 눈이 맞았는지 그 후손이 누구인지 무지개 피라미가 누구네 돌담으로 들어갔는지 서론이 긴 사람이 어떻게 본론으로 걸어갔는지 태양의 말씀을 누가 차근히 받아 적었는지 다 알고 있지만 침묵하는 여기에서 바지도 젖고 가슴이 젖는, 그렇게 옛 스님들도 젖다 갔을 여기에서 아침을 알리던 닭 모가지 자른 중생이 누군지 알면서도 탓하지 않는 여기에서 아침이 그렇게 사라져도 냉수 한 사발 찾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하는 여기에서 내가 무슨 말을 참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 여기에서 다 알고 있어서 붉어지는 초록에게 눈짓하면서 미소 한 덩이가 먹고 싶어진다
이경호 시인(서산) / 쭉정이 콩을 위한 만가
하늘은 이미 남의 것 너희는 바닥만 고집하여 머리 세우지 못했지
하늘이 낸 성골은 배가 불러오는데 너희는 숨죽이며 신음하였다지
골반 한번 뜨거워보지 못하고 입덧도 모르고 살다가 낫질에 내동댕이쳐지고
아, 차가운 눈발들이 무덤을 만들면 언제 다시 일어날 수 있겠나
한철 바닥에 엎드려 함께 살았으나 너희가 콩이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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