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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영숙 시인 / 나비그림에 쓰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5.

허영숙 시인 / 나비그림에 쓰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다 꽃길이라 믿었던 시절 득음한 꽃들의 아우성에 나도 한 때 꽃을 사모하였다 꽃을 사모하니 저절로 날개가 돋아 꽃 안의 일도 꽃 밖의 일도 두근거리는 중심이 되었다 꽃술과 교감했으므로 날개 접고 앉은 자리가 모두 꽃자리였다

 

꽃길을 날아다녔으나 꽃술을 품었다고 흉금에 다 아름다운 분粉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겹눈을 가지고도 읽지 못한 꽃독에 날개를 다치고 먼 남쪽 다산에 와서 앉는다 낮달이 다붓하게 따라온다 주전자에는 찻물이 끓고 *꽃 밖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꽃술을 사모하여 맴돌지는 말아라 오래 전 날개를 다치고 이곳에 먼저 와서 앉았던 사람이 더운 붓끝으로 허공에 쓰고 있다

 

*정약용의 시 “題蛺蝶圖” 에서 인용

 

 


 

 

허영숙 시인 / 바코드

 

 

A4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라 한다

나무 한 그루 다 갈아엎어도 쓸 수 없는 낮과 밤을,

그 안에서 생겨 난 만 갈래의 길을

접고 또 접어서 써라 하니 난감하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어느 길 위에 이른 내 몸에서는 새 잎이 돋고

또 다른 모퉁이에서는 다시 그날의 눈이 쏟아진다

길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새우깡 겉봉에 찍힌 바코드를 본다

저 굵고 가느다란 세로 줄에 기록된 것은

출고일자 혹은

여기로 오기까지의 경로 표시에 불과할 뿐

분말로 든 새우의 길에 대해

기억 안에 있거나 기억 밖으로 밀어 낸

파랑의 날들에 대해 모두 기록할 수 없다

찬물에 돌미나리를 씻으며 울고 싶었던 이유가

시린 손 때문이라고만 쓸 수 없다

 

밟아온 길을 다시 일으켜 세워 바코드를 만든다

고음으로 내질렀던 푸른 날의 한 때를

굵게 긋다가 올려다 본 하늘

정오의 햇살이 내 몸의 바코드를 환하게 찍고 간다

 

 


 

 

허영숙 시인 / 나무의 필법

 

 

잎의 문장을 다 지운 나무를 들여다보면

가지와 가지끼리 서로 기대며 쓰고 있는

필법은 y다

한 획을 기울여야

또 한 획이 기댈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저토록 촘촘한 기울임의 힘으로

잎은 다시 무성해진다

 

휘면 부러질까 기울인 적 없는 사람의 등은

늘 비어있다

잎을 피울 수 없으므로 그늘도 없다

어딘가에 기댈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받아 줄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

 

바람이 벚나무에 기대어 있는 은혜병원 앞

아픈 사람에게

어깨 한 쪽을 내어 준 사람의 등에 햇살이 번진다

막 눈 뜨기 시작하는 생장점

y의 푸른 순筍이 돋고 있다

 

 


 

 

허영숙 시인 / 낮잠 1

-흉몽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날이었다 마당에서 개가 불안을 컹컹 짖어댔다 사람들은 예고도 없이 붉은 나비들을 끌고 들이닥쳤다 나비들은 꽃 위에 날아가 앉았다 꽃은 놀란 입을 오므리고 잎은 바들바들 떨었다 사람들은 나비가 앉았던 꽃잎을 능숙하게 떼어가기 시작했다 꽃의 기억도 뜯어 갔다 어떤 꽃은 뿌리째 뽑아갔다 동생은 오줌을 지렸고 빈 꽃대를 붙잡고 어머니가 울었다 애벌레처럼 오래 웅크리고 있던 어머니가 날개를 펴기 시작한 새벽, 나비 한 마리 조용히 날아가는 것을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나는 빈 허물을 쥐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불을 움켜쥐고 잠에서 깬다 울음은

꿈밖으로 번져 나와 철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허영숙 시인 / 파래소

 

 

파래소폭포 앞에 터를 잡은 물푸레나무

좁다란 목구멍에서 쏟아내는 푸념을 듣고 자라

잎 사이사이 내 비치는 그늘이 서늘하다

속까지 다그치고 다그쳐서

움츠려든 어떤 잎은 지극히 소심해졌다

기슭을 돌아오며 살점이 깎이고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동안

안으로 둥글게 말아두었던 말

벼랑 끝에 이르러 물은 직설적으로 쏟아낸다

그 소리를 날마다 들어야 하는 물푸레나무

희고 커다란 목소리가 넘치고도 남아

잎은 어질어질 흔들리고

밑동은 반쯤 허물어졌다

할 말 다한 물은

깊은 소沼를 이루어 새로 하늘을 품었다

그 속에 물고기도 키우고 바람도 키우는데

물푸레나무 빗살무늬 잎잎의 젖은 귀에는

흠집만 가득하다

물푸레나무를 보고 온 날 밤

누군가의 푸념을 듣고 나면

왜 그렇게 마음이 자주 허물어졌는지

파래소, 깊은 물색을 보고 알았다

 

-허영숙 시인'의 첫 시집 『바코드』

 

 


 

허영숙(許英淑) 시인

1965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부산여자대학 졸업. 2006년 《시안》으로 등단. 현재 〈시마을〉동인으로 활동 中. 시집으로 <뭉클한 구름 2016> 『바코드』(문학의전당, 2010) 『뭉클한 구름 2016』이 있음.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