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숙 시인 / 나비그림에 쓰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다 꽃길이라 믿었던 시절 득음한 꽃들의 아우성에 나도 한 때 꽃을 사모하였다 꽃을 사모하니 저절로 날개가 돋아 꽃 안의 일도 꽃 밖의 일도 두근거리는 중심이 되었다 꽃술과 교감했으므로 날개 접고 앉은 자리가 모두 꽃자리였다
꽃길을 날아다녔으나 꽃술을 품었다고 흉금에 다 아름다운 분粉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겹눈을 가지고도 읽지 못한 꽃독에 날개를 다치고 먼 남쪽 다산에 와서 앉는다 낮달이 다붓하게 따라온다 주전자에는 찻물이 끓고 *꽃 밖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꽃술을 사모하여 맴돌지는 말아라 오래 전 날개를 다치고 이곳에 먼저 와서 앉았던 사람이 더운 붓끝으로 허공에 쓰고 있다
*정약용의 시 “題蛺蝶圖” 에서 인용
허영숙 시인 / 바코드
A4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라 한다 나무 한 그루 다 갈아엎어도 쓸 수 없는 낮과 밤을, 그 안에서 생겨 난 만 갈래의 길을 접고 또 접어서 써라 하니 난감하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어느 길 위에 이른 내 몸에서는 새 잎이 돋고 또 다른 모퉁이에서는 다시 그날의 눈이 쏟아진다 길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새우깡 겉봉에 찍힌 바코드를 본다 저 굵고 가느다란 세로 줄에 기록된 것은 출고일자 혹은 여기로 오기까지의 경로 표시에 불과할 뿐 분말로 든 새우의 길에 대해 기억 안에 있거나 기억 밖으로 밀어 낸 파랑의 날들에 대해 모두 기록할 수 없다 찬물에 돌미나리를 씻으며 울고 싶었던 이유가 시린 손 때문이라고만 쓸 수 없다
밟아온 길을 다시 일으켜 세워 바코드를 만든다 고음으로 내질렀던 푸른 날의 한 때를 굵게 긋다가 올려다 본 하늘 정오의 햇살이 내 몸의 바코드를 환하게 찍고 간다
허영숙 시인 / 나무의 필법
잎의 문장을 다 지운 나무를 들여다보면 가지와 가지끼리 서로 기대며 쓰고 있는 필법은 y다 한 획을 기울여야 또 한 획이 기댈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저토록 촘촘한 기울임의 힘으로 잎은 다시 무성해진다
휘면 부러질까 기울인 적 없는 사람의 등은 늘 비어있다 잎을 피울 수 없으므로 그늘도 없다 어딘가에 기댈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받아 줄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
바람이 벚나무에 기대어 있는 은혜병원 앞 아픈 사람에게 어깨 한 쪽을 내어 준 사람의 등에 햇살이 번진다 막 눈 뜨기 시작하는 생장점 y의 푸른 순筍이 돋고 있다
허영숙 시인 / 낮잠 1 -흉몽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날이었다 마당에서 개가 불안을 컹컹 짖어댔다 사람들은 예고도 없이 붉은 나비들을 끌고 들이닥쳤다 나비들은 꽃 위에 날아가 앉았다 꽃은 놀란 입을 오므리고 잎은 바들바들 떨었다 사람들은 나비가 앉았던 꽃잎을 능숙하게 떼어가기 시작했다 꽃의 기억도 뜯어 갔다 어떤 꽃은 뿌리째 뽑아갔다 동생은 오줌을 지렸고 빈 꽃대를 붙잡고 어머니가 울었다 애벌레처럼 오래 웅크리고 있던 어머니가 날개를 펴기 시작한 새벽, 나비 한 마리 조용히 날아가는 것을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나는 빈 허물을 쥐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불을 움켜쥐고 잠에서 깬다 울음은 꿈밖으로 번져 나와 철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허영숙 시인 / 파래소
파래소폭포 앞에 터를 잡은 물푸레나무 좁다란 목구멍에서 쏟아내는 푸념을 듣고 자라 잎 사이사이 내 비치는 그늘이 서늘하다 속까지 다그치고 다그쳐서 움츠려든 어떤 잎은 지극히 소심해졌다 기슭을 돌아오며 살점이 깎이고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동안 안으로 둥글게 말아두었던 말 벼랑 끝에 이르러 물은 직설적으로 쏟아낸다 그 소리를 날마다 들어야 하는 물푸레나무 희고 커다란 목소리가 넘치고도 남아 잎은 어질어질 흔들리고 밑동은 반쯤 허물어졌다 할 말 다한 물은 깊은 소沼를 이루어 새로 하늘을 품었다 그 속에 물고기도 키우고 바람도 키우는데 물푸레나무 빗살무늬 잎잎의 젖은 귀에는 흠집만 가득하다 물푸레나무를 보고 온 날 밤 누군가의 푸념을 듣고 나면 왜 그렇게 마음이 자주 허물어졌는지 파래소, 깊은 물색을 보고 알았다
-허영숙 시인'의 첫 시집 『바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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