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 시인 / 인기척을 지우며 소년이 걸어갔다
회당에 들어서자 겨울이었다. 키가 불쑥 자란 소년은 문을 나서기 전에 어디로 갈지 결심했다. 지구본을 돌리면서 수없이 많은 장소를 기억했다. 손가락이 눈에 익은 아프리카의 초원을 가리켰다 구불구불한 흙길을 나무 수레가 지나가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옛집이나 페루의 새 무덤이나 빙하의 무겁고 단단한 방향은 어때 춥고 배고픈 지역이지만 무척 생생한 고향 같아요. 고향이 내게 있다면 거기는 어디였을까. 기억하렴 너는 네가 갈 수 없는 외국이야 그러므로 어디로 가야 할지는 소년만이 안다 화성에서 명왕성만큼이나 먼 길을, 입술을 굳게 닫고 온몸에 묻은 인기척을 지우며 걸어갔다. 그림자들이 철책을 지나 계곡을 넘고 히말라야까지 이어졌다. 소년을 쫓는 사나운 발자국은 점점 화석이 되고 까마득히 먼 훗날 발굴되기만 기다렸다. 소년이, 자신을 지우며 걸어갔다 대홍수와 빙하기를 지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계간 『시와 정신』 2021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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