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식 시인 / 젖은 신발 한 짝
아파트 야간 경비를 마치고 귀가를 서두를 때면 발바닥이 욱신거리고 눈동자가 자주 풀린다
잠시 물웅덩이 가장자리를 디뎠을 뿐인데 걸음마다 신발 앞코에 거품이 일고 젖은 양말 속에서 다섯 발가락이 바둥거린다 온몸이 축축해진다
안쓰러운 신발 한 짝을 창틀에 세워둔 채 사툰 잠을 청하고 자다 깨다 눈을 떴다 오후의 가을 햇살이 어느새 신발의 수분을 날려버렸는지 푸석하다
어두운 신발 속 그 안을 한참 들여다보니 노스님이 잠깐 탁발 나간 듯 퇴락한 절간처럼 쓸쓸하다
빈한한 일가를 감당해온 나의 신발 투정도 없이 야위어가는 유물 앞에서 나는 철없는 아이같이 쭈그리고 앉아 아직도 무언가를 바라는 것인가
박노식,『고개 숙인 모든 것』, 푸른사상, 2018
박노식 시인 / 잔인한, 그러나 신성한 봄
비 내리는 소리에 창문을 연다
감나무 가지가 비를 맞고 있는 앞집은 주인이 없다 노인은 한 달 전 안산에 들었는데 감나무 한 그루만 등을 굽히고 노인을 배웅했을 뿐이다
삼월이 가고 사월이 찾아왔으니 지상의 꽃잎들 스스로 문을 연다
머지않아 이 비 그칠 때, 즐비한 벚꽃들 먼저 돌아가고 앞집 감나무 가지엔 연둣빛 새순이 올라올 것이다
잔인한, 그러나 신성한 봄이다
박노식 시인 / 목련
목련을 보고 병실로 들어선다
누이의 얼굴은 핼쑥하고 볼은 오목하다
정오의 햇살이 하나뿐인 창을 내리쬐어서 침상 머리맡의 베개는 더욱 하얘진다
간호사가 병실 문을 단숨에 나가버리니 목련이 그립다
박노식 시인 / 무거운 아침
안개가 이동하기까지 공복의 풀별레들은 납작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
습한 병실의 가족처럼 슬픈 표정이어서 만질 수가 없는데 더욱이 손바닥을 비벼 서늘한 거처를 데울 수 있으랴
유난히 등이 휜 어미는 야위었고 새끼는 멀찌감치 손톱만 한 풀잎 아래 누워 있다
나의 작은 한 뼘이 어미와 새끼의 거리를 잇지 못하는, 마음이 멀어 닿을 수 없는 무거운 아침이다
오래 앉아서 침묵이 흘러가는 동안 나의 등줄기도 그새 야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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