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 시인(서산) / 끈
나 처음 세상에 나와 떨던 날 어머니 마늘 캐셨다
나 처음 세상에 나와 울던 날 아버지 머슴살이 방아 찧고 계셨다
삼십삼년 지난 오늘 어머니 마늘 캐신다
아버지 아파트 경비원 머슴살이 하신다
이경호 시인(서산) / 덕담시대
개구리 둘이서 콩밭을 뛰어다녔다 늙은 개구리는 아주 오랫동안 심심했던지 콩대 져 나르는 동안 개굴개굴 잘도 울어댔다
그거 알아? 개구리끼리는 울음소리 서로 밸 때까지 우는 거, 그래야 상대 마음까지도 알아보는 거여 처음엔 우는 법을 몰랐지 배고파서 창자창(唱)한 자락 읊고 있으면 이웃개구리들이 들여다보고 한참 울어주던 시절이 있었지 자네는 금방 일어날 거여 젊고 부지런하잖은가 그 울음 한 사발에 힘은 남아돌더라고 한 뼘 뙈기밭도 커 보이더라고 말 한마디가 밥이더라니까 콩도 자기들끼리 울어주면서 여무는 거여 알을 다 쏟아내고 아궁이에서 탈 때 소리 지르는 것도 다 울음소리가 밴 때문이여 서로 좋은 소리 해가며 살아야 하는 거여 어디 가든 그래야 하는 거여 곡식 한 됫박은 아무것도 아녀 말씀 한 됫박이 최고인 거여
이경호 시인(서산) / 오양
만선의 깃발을 세우고 싶었다 한 번만 목숨 걸고 배를 타면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노라 했다 눈물의 배는 정박하면서 긴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나 스물 네 시간 배를 타야만 했다 대전에서도 만만찮은 몸값을 받았는데 만선의 뱃노래 부르지도 못하고 줄에 매달려 여기까지 왔다 단돈 칠백만 원 때문에 뭉칫돈 노린 보자기에 남정네를 씻어주며 비린내 밴 처녀막도 바다에 버리고 오늘도 찻잔 들고 배달을 간다 섬에 가면 아가씨가 예쁘다는 소문은 뱃고동에 실려 바닷가를 떠돌고 텅빈 가슴 잦은 황사로 뿌옇기만 한데 거친 파도 어둠 속에서 한 시간 만 원짜리 등대가 되는 오양은 등대다방의 얼굴이다
이경호 시인(서산) / 무인도
해마다 저 혼자 봄을 기다려 딱 한철 울긋불긋 진달래 치마 차려입고 머리핀을 꽂는 섬
일 년을 기다려 딱 하루 생일상 받아놓고 더덩실 좋아 웃는 노인네 하나
이경호 시인(서산) / 귀향
바람 끝에 그가 앉아 있다 물때 낀 소주병 가스통 플라스틱 물병 마른 풀 사이에 둥둥 떠 있다
늦은 오후 바늘 던졌지만 찌는 안 보이고 거머쥔 매운탕거리도 없다
북서풍이 몰고 왔으리라 갈대처럼 수그린 그를 까치놀이 얼굴 어루만진다 춥지 않느냐고 너무 웅크리지 말라고
소주병도 한때 어느 가슴 화력이었고 부탄가스통도 한 끼 밥솥 아래 있었다고 고개 들라고 수고했다고 까치놀이 그를 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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