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숙 시인 / 와인터널
“아가야, 언놈이 나를 노려보고 옷을 자꾸 벗으라 한다 내 좀 살리도 제발"
육지 속, 또 다른 섬 먼지 쌓인 입구 쪽으로 너울처럼 밀려오는 가르릉 가쁜 숨결 늘 더디 오던 봄처럼 출구를 끌고 갈 것들은 어디쯤 표류하는지 모를, 지금 한 방향으로만 타협했을, 막바지 질주는 감속기어 없는 시간의 풍속風速 세상 아닌 세상을 더디 지나며 얼마나 더 가야만 봄날의 정착지, 가 닿을지 흔한 안내문 한 줄 찾을 수 없다 이편과 저편 사이 경계인처럼 서성이던 십수 년 바람을 포용했던 돛의 기억은 낡고 삭아 밀물 빠진 갯벌에 홀로 정박해 있다 헤진 언덕 어디쯤 닿을 못 내린 채 부러진 노가 어두운 질감을 바닥에 켜켜이 꽂는다 굳은 관절들이 비틀어진 척추마다 등을 내 건다
비상등이 번쩍, 달려온다 한쪽 솔기가 막힌 와인터널처럼 어머니, 남기고 갈 미련을 숙성시키고 있다
문현숙 시인 / 동행
물살보다 천천히 흘러가는 모래알들 흐르다 멈추다 또 흘러간다 등을 맞댄 여자는 오래전부터 남자의 흘러가는 마음을 경전처럼 읽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어제가 익숙한 오늘이다 떠밀려가도 사라지지 않는 물그림자들이 지금껏 지워내지 못한 추억을 닮았다 흘러가기만 하는 남자와 흘러간 것조차 숨구멍이 된 여자는 무섬 외다리를 건너가 포개진 갈대숲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동행은 두렵고 불안한 무서움에 드는 일 벗어날 수 없는 소용돌이로 번져가는 일이다 따가운 갈볕에 휘어져 반짝이는 내성천은 버린 애인처럼 다시 만난 연인처럼 무섬을 껴안고 흘러가고 흘러온다
계간 『시에 2018 겨울호』, <시와 에세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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