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수 시인 / 포도 한 알이 구를 때
고양이를 생각한다 검고 푸른 눈의 고양이
그 고양이의 눈을 가만 들여다보면 새끼줄처럼 비비 꼬인 달팽이 먼 곳을 향해 송신 안테나를 꽂은 달팽이 고양이는 여자의 몸처럼 등글둥글 곡선을 가졌다
고양이 눈알을 가져다 내 책상위에 또르르 굴려본다 구르다 만 고양이의 눈 치켜뜬다 내 책상 모서리쯤에서 굴러 떨어진다
굴러 넘어져 있던 자전거 일으켜 세운다 차르르 구르는 두발바퀴 바퀴살은 발열하는 고양이 눈빛, 아기 울음을 운다 아기울음이 집 밖으로 나간다.
자전거와 고양이가 나란히 달린다 튕겨나간다 달팽이가 자전거를 거부한다 고양이 눈 속엔 달팽이가 있다 고양이가 다시 책상위의 제 눈을 찾아간다
심명수 시인 / 텔레비전 고장 나면
내용 없이 그녀가 하얗게 웃는다
나는 얼굴 없어 마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어디를 봐야 할지도 난감하다 주인 없는 말들이 저희들끼리 방안을 떠돌아다니며, 나의 생각과 나의 언어들을 훼방 놓는다
고장 난 것들은 때론 괴팍한 법 토라진 그녀가 다시 얼굴을 바꾼다 그녀가 딱 하고 불꽃 뱉어내면 오존같이 풍기는 전하 방안 사물들은 일제히 구린내 풍기듯 소란하다 나도 가끔 그녀로 인해 몸의 털들이 쭈뼛 서기도 한다
고장 난 창 빛이 삐걱거리며 닫히면 나는 갑자기 캄캄해지고 그녀는 암중모색 다시 창을 연다 하얗게 일그러진 창밖 소리로 원인을 규명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소리의 회로란 멀고도 복잡하다 기억의 소자는 수렁 같아서 쉽사리 빠져나온다 해도 통과 여부를 묻는 놈이 떡 버티고 있어 까다롭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발광 모자를 벗지 않는다면 낭패 볼 것은 없다
그녀가 웃는다 웃다가 일그러진다 나는 밤새도록 창을 열어 둔다
심명수 시인 / 그 노총각 참 쓸쓸하다
난로 위 맹물 쫄고 있는 주전자, 주전자가 열이 바짝 올라 있다
꼭지 달린 모자 눌러 쓴 주전자는 콧대가 높다 감기라도 걸리면 코마개 할 때도 있다 그러면 가래 끓는 목 가다듬으면서도 철없이 태평소를 불어 댄다 사람들은 잠시 일손을 놓고 아랫목 같은 그 주변으로 둘러 앉아 젖은 깃 털듯 마른 손을 비벼대며 태평소 이야기에 젖곤 했다 그러나 이젠 찾아주는 이라곤 잠시 왔다간 사무실 미스 홍, 한두 잔 뜨거운 커피물만 콜록콜록 따라갈 뿐, 사람들에게 태평소는 시끄러운 소음일 따름이다. 주전자는 얼굴 가득 침통한 기색으로 화끈거린다. 줄담배를 피운다. 수음 하듯 뿜어 대는 탄식의 비음. 난로는 풀무처럼 쉼 없이 불을 뿜어내고 주전자는 매번 모자만 벗었다 썼다 할 뿐, 속이 타는 자의 갈증을 알아주는 이 없다. 구수한 보리차, 생강 조각을 썰어 넣고 목 가다듬어 한없이 불던 태평소, 이제는 한 모금 훌쩍이며 적실 이도 없다
밤새도록 달아 있는 난로 위 사내의 아랫도리가 쓸쓸하다.
심명수 시인 / 허공에 우울증이 매달려 있다
관념의 다이아몬드 못을 박아 거미가 집을 지었다 먹줄 튕기며, 얼개 팽팽하게, 때론 탄력 있게 얽어놓고 사람들은 함부로 그 생의 회로도를 빗자루로 쓸어낸다 청소 용역인처럼 중요한 증거를 함부로 삭제해버린다 가끔씩 누락된 것들 사다리 타고 내려와 쓸려나간 원인을 묻고 가기도한다
누군가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누락되었다 맑은 허공에 파문이 인다 파문은 거미집처럼 의혹을 남기고 허공을 아파한다 허공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고질병 같은 안개 밀려왔다 밀려간다 말랑말랑한 잠을 흔들어 깨워놓고 천연덕스럽게 웃는 얼굴 핼쑥한 그림자도 끌고 와 발밑에 함부로 버린 나의 원고들과 생의 질긴 목을 조인다
이제 누가 방아쇠를 당겼을까 반짝이는 물결, 깨어진 거울이 생각을 어지럽힌다 나는 깨진 거울의 각진 표면의 모서리에서 실명한 눈에 비치는 이지러진 달을 보듯 나를 본다 적중이다 물컹한 생의 속살 속에서 피가 짓물러 흐르고 너는 그렇게 과녁 속으로 떨어졌다 허공은 다시 우울증을 매달고 베레타 M9 실탄이 다시 나를 향해 날아온다
심명수 시인 / 별
누가 밤을 저리도 송곳으로 콕콕 찍어 놨을까
-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 문학세계사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찬호 시인 / 만년필 외 1편 (0) | 2022.07.27 |
---|---|
서윤후 시인 / 발광고지(發狂高地) 외 4편 (0) | 2022.07.27 |
문현숙 시인 / 와인터널 외 1편 (0) | 2022.07.26 |
권민경 시인 / 오늘의 운세 외 5편 (0) | 2022.07.26 |
노운미 시인 / 로드 킬 외 1편 (0) | 2022.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