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시인 / 만년필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의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송찬호 시인 / 사냥꾼의 후예
사슴이 사냥꾼에 쫓기다 강을 건너 저 그림 속에 숨어들었다오
사냥꾼도 뒤쫓아와 강을 건넜지만 사슴을 찾을 수는 없었다오
백 년에 한 번씩 사슴이 수풀을 헤치고 나와 그림 속 바위에서 논다오
저 그림은 이쯤에서 감상하는 게 가장 좋소 그리고, 나는 그 사냥꾼의 후예라오
<문학청춘> 2021. 겨울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용산 시인 / 동굴 외 1편 (0) | 2022.07.27 |
---|---|
윤의섭 시인 / 장구한 파멸 (0) | 2022.07.27 |
서윤후 시인 / 발광고지(發狂高地) 외 4편 (0) | 2022.07.27 |
심명수 시인 / 포도 한 알이 구를 때 외 4편 (0) | 2022.07.27 |
문현숙 시인 / 와인터널 외 1편 (0) | 2022.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