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9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작 > 서윤후 시인 / 발광고지(發狂高地)
버려진 산소호흡기를 핥다가 어린 고양이 입김 서리는 것을 본다
무언가 닦아내면 어떤 것이 사라질 것만 같다 이를 모든 것이라고 부르는 아른거림만이 유일한 궁금증
또, 또 지리멸렬한 날씨
무너진 성곽이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 잘 닦아놓은 미래가 있었다 모두가 돌아오게 되는 반환점으로 숨 쉬는 것을 가여워하게 되는 전개를 펼치고 그 사이사이의 안개
오리무중의 발진이다
창광하는 밤벌레들처럼 거리로 나온 아침 인간의 얼굴을 구경한다 전망할 수 없는 표정들에 휩싸여 있으면 어린 고양이의 숨 같은 건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다
또, 또 어두워지려는 심장
들리지 않는 것을 어둡게 하면 꿈 밖으로 나와 소리치는 빛 환호는 환희의 별미라도 되는 듯이 인간을 재주넘는 (영혼, 마음 다음에 생각나는 것)의 취미활동
무덤가의 구구절절한 침묵을 듣는다 이곳 사랑은 절판된 기억으로 세워져 있다 그들은 모두 옛사람 같다 세련된 스카프를 해도, 영어로 된 개 이름을 불러도
죽음이 신간처럼 여전히 새롭다는 사실은 새로울 게 없다 푯말의 역사를 읽는다든지 소문이 눈앞 미래로 유인한다든지 하는
장례식장에 막 납품된 수육의 뜨거운 김 아무도 배고프지 않은 곳에서 해치워나가게 되는
무엇이 신비로운 감옥을 짓는가 그 안에서 알고 싶어 하게 된 것은 무엇인가
또, 또 아름답기 위해 사라지는 것들
어제 입었던 옷을 입는다 이변이 없는 한 오늘 비가 내리지 않을 것 같다 몇 개의 부음을 화면에서 쓸어 넘긴다
열몇 개 와이파이 중에 비밀번호 들어맞는 게 없다 매일 두절되어도 끝나지 않는 것이 있어
가장 어두움 중에 가장 어둡지 않은 그런 머리색을 가진 학생이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전속력으로 달려 나간다
서윤후 시인 / 의문과 실토
신(神)의 자연사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뿔을 기른다는 건 뿔을 지켜보는 믿음에서 비롯되지요 상상 속에서 겨누고, 맞서고, 찔리다 비기는…… 허깨비들의 연속극처럼
죽은 자의 어둠은 어디로 다시 기어가 인간 행세를 할지 의아하군요 침묵이 내전(內戰)을 끝내지 않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날 때까지 시궁을 조성하니까
인간의 무고한 슬픔을 감상하기 좋은 날이 찾아왔군요
이 슬픔으로 굳은 거푸집은 집안 마당의 포도나무와 갓 태어난 아이와 마루 밑 고양이의 하품까지도 빚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뿔이 서로의 허점을 겨누며 파고들 때야 인간은 빠르게 번성하고, 조물주는 다른 재물을 찾아 떠나더군요 쓰다듬을수록 뿔은 덧나기 쉽고
슬픔도 기쁨도 알 리 없을 만큼 어리석고 깨끗한 영혼을 물색하던 신(神)의 노고가 우산 끝에 맺혀 있는 걸 봅니다
인간이 지칠 때까지 뿔 같은 비가 뿔 같은 비를 적실 때까지
서윤후 시인 / 신비와 무질서
오랫동안 바다를 걷고 돌아와 무심코 콧잔등을 쓸어보았을 때 흰 가루가 묻어 나왔다 나는 알 수 있어도 궁금해서 혀로 핥았다
“정희에게 스무 번째 생일 축하해. 우리 종로에서 삼계탕 먹은 날. 1997. 7. 15”
간밤의 독서가 헌 책방에서 고른 시집에 적힌 서명으로 사로잡힐 때
복도의 발자국 소리와 열쇠끼리 부딪치는 소리 당직 경비원 휘파람까지 흔들어보면 알 수 있었다 내가 손에 꽉 쥐고 있는 게 무엇인지
태풍이 북상하면 유리테이프를 크게 찢어 가위표 모양으로 창문에 붙이던 사람이 생각났다 뭐해?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하면…… 재주 좋게 살아남은 생활이 있었다 겨울 동안 창문에 붙여놓은 완충제를 거두진 못했다 겨울은 금방 또 올 테니까
바람 빠진 게 된다는 것 오랫동안 키스를 나눠도 불어넣을 수 없는 그런 활력은 뿔 대신 수염을 기르는 순록의 것이 아닌 오늘 도착하지 못한 나의 것
친척 결혼식만 다녀오면 한숨이 늘어나는 엄마의 재주를 알지 못하였다 쏟아질 듯 꽉 찬 책꽂이가 반질반질한 돌을 모으던 죽은 아비의 장식장처럼 보인다면
나는 걷는 게 어색해 자주 멈추게 되었다 잘못 날아온 철새를 알아봐도 정희를 알게 되었어도 달라지는 게 얼마 없듯이
알고 있어서 더는 해보지 않는 게 있었다 알고 있어도 궁금한 일들이 빠르게 멸종하고 있다는 것도
불분명한 마음마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두 눈을 뜨고도 믿지 못했다
창문에 묻은 손자국 하나가 오늘 밤 가장 낮은 바닥을 짚은 것 같다
서윤후 시인 / 초절기교(超絶技巧)*
1.
매일 계속 무거워지는 문 내가 나갈 수 있는 날이 몇 번 안 남았다는 듯이
부서져야 비로소 흩날릴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쓴다 뼈로 시작해서 뼈로 끝나는 마디 유령은 자신을 위한 세레나데인 줄 알고 영혼을 흘리며 다니다가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본다 더러운 눈송이 더는 간직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희망은
2.
한 꺼풀 멀미를 벗겨내면 다시 오고 싶어지는 바다 방 하나 출렁일 자신 없는 파도와 바캉스가 까마득하게 잊은 나
이 측은한 풍경화가 걸려 있는 가건물과 눈길만 주고 가는 폐업 신고자 눈보라를 뚫고 사라지는 개
이것은 해골 속 모퉁이의 풍경
3.
지혜로운 인간은 벽을 오릴 줄 안다 제 키보다 큰 문을 짓고자 하는 서글픔으로 잡아본 가장 따뜻했던 손을 본떠 손잡이를 만드는 수리공은 이제 글썽거리지도 않는다 나의 문은 통과의례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무겁게 어색해지는 것으로 잠기는 장치
실내 안의 실내 안을 실내가 장악할 수 없을 때까지 나는 눈을 감고 터널을 지어 통과하고 운전 미숙으로 교통대란을 일으키며 밤새운 파수꾼에게로 가 눈인사 건넨다 밤이 몰래 키운 숲속으로 향한다 움막 짓고 역사를 재현한 원시인들의 내부까지 텅 빈 플라스틱 육체를 내다 버리는 분리수거함 안까지 그림자 도시는 시민들의 육체 없이도 성행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문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 그리고 궁금해하지 않는 것
4.
나가기 위해 기꺼이 들어온 사람아 웅장한 실내악을 켜둔 채로 잠들어 있는가 허밍이 빚은 곁눈으로 바라본 세계는 나 없이도 휘황찬란하게 연속되고 있는가
부정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나아질 리 없는 불행한 시리즈처럼
비가 많은 구름일 것이다 아직 내리지 않은 (멈춘 적이 없어 도착할 줄 모르는) 연습이 끝난 피아노 페달처럼 부드럽게 가라앉는다 (생활 속의 교양) 비와 음악 사이에 가지런히 놓인 진공관이 되었다 (중계자의 삶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서서히 커지는 파장 그러나 다가오지 않는 인기척 그런 의심으로부터 이 지루한 비극을 다 해진 플롯을 이야기가 필요한 거리의 동냥꾼에게 건네고 싶다
이제 시시하게 소멸해가는 것을 보라 ⋮ ⋮ ⋮ ⋮ ⋮ 그것이 어떻게 이 악물고 커나가는지 보라
5.
창문 밖 전복 사고 난 차량이 있다 신호가 바뀌어도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는 광경이 있다
이 도시는 그렇게 멈춰 있다 식어가는 커피잔과 대치하는 창틀에서
침묵도 발길을 끊은 입술이 참 재미있었다 슬픔을 친인척으로 둔 혀가 매일 아슬아슬하게 가정사를 반복하려고 했다 불 꺼진 귀, 살아서 들키지 않는 귀 그런 악기가 필요했으므로 이곳에 살아서 듣게 된 고요는 음질이 좋지 못하다
6.
검은 눈을 바라보는 석탄 공장의 새카만 창문 속에 흰 눈동자를 보라
부디 나의 오랜 연습이 누(累)가 되지 않았기를
* Franz Liszt.
서윤후 시인 / 나나너너
항구에는 배를 타러 온 사람보다 바다만 구경하러 온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그해 여름, 데려오지 못한 것이 있어 나는 수몰된 풍경에 두 손을 담급니다 두 손이 걷는 날입니다
겨울이면 우린 서로의 아껴 모았던 여름으로 녹이고 싶은 물의 마음을 헤맸습니다 그 속에서 꺼낸 죽은 생물은 너의 손이었을까요 그해 여름, 사진 한 장 없이 함께 기억하는 바다에 대해서 엇비슷한 제목을 지으며 살아갈 수도 있겠어요
너의 언어 너의 노래 너의 이름을 나는 여름의 한 구절로 외웠던 적도 있었는데, 너는 왜 여름을 좋아해? 이 세상 온통이 여름인 것처럼? 아득한 질문은 나를 오래 살게 합니다 벙어리장갑보다 작은 너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주 혹독하고 추웠던 한 시절을 녹이기 위해 이만큼 덥고 습하게 숨 쉬며 견디는 것 같아요 나는 언제나, 곁에 내가 없는 당신만을 좋아했는데 두 손으로 빠져나가는 우린 비늘을 닮고도 다른 헤엄을 친 것이 틀림없어요
그해 여름 우리는 배를 타러 가지 않고 바다만 보고 돌아오자는 말을 했습니다 제목 없이 저장된 산문처럼 끝없이 끝을 향해 가볼 수도 있었을 여름이었는데, 미완성 파도만이 나를 밀어냅니다 지나온 여름이 우리를 기억할 때, 겨울에도 손에 땀이 나는 이유를 나는 조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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