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나 시인 / 초승밥1)
사랑할아버지 저녁밥상에 남긴 밥 초승달을 닮아 초승밥입니다
진지를 자실 때면 흰 종지에 담긴 지렁2)부터 먼저 뜨던 사랑할아버지는 입맛이 없다시며 어흠어흠 늘상 밥을 남기십니다 사각반 위의 알찜이며 생치生雅적 북어보포라기 맛난 반찬은 저분을 대는 둥 마는 둥 웁쌀3) 얹어 안친 뚜껑밥 애벌 푼 흰 입쌀밥을 너덧 술 남겨 꼭 체면을 하십니다 수저를 상에 내려놓고 보리숭늉으로 볼가심을 하고는 일찌감치 상을 물리십니다
사랑할아버지 진짓상은 이제 내 차집니다 밥물 넘어 들어간 호로록 알찜도 녹진녹진 구운 생치적도 포실포실 북어보푸라기도 주발 맨바닥 초승달같이 뜬 밝은 입쌀밥도 내 차집니다
시월 초이레는 사랑할아버지의 기일입니다 하늘 귀엔 사랑할아버지가 밥상물림 하던 입쌀밥 같은 초이레 달이 떴습니다
1) 경북 북부지방 양반가에선 어른이 밥을 남기는 것을 '채민 한다'고 했는데, 남긴 밥이 초승달처럼 생겨 '초승밥'이라고 한다. 2) 조선간장. 3) 솥 밑에 잡곧을 깔고 그 위에 조금 얹어 안치는 쌀.
《시인동네》 2020. 3월호
홍경나 시인 / 라고를 생각하다
말을 고르고 있는데 머뭇거림이 먼저 네게 전송되었는지〈라고 보냈어〉라는 문자가 왔다
나는 라고를 생각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네가 오는 방향으로 일어나 창밖으로 목을 내밀고 버뮤다와 아프리카 모스크바와 마드리드 오른쪽과 왼쪽 문득 다른 끝에서 불현듯 혼자 호주머니 속의 저녁 7시와 저녁 7시 이후 여전히 눈부시게 나를 에워싸는 라고를 생각했다 하얀 생크림 생일케이크가 되어 분명하게 뛰는 숨소리가 되어 조용히 착지하는 곁이 되어 라고를 생각했다
〈집사람에게 보낸 문자가 잘못 갔습니다〉
나는 라고를 생각했다 소복소복해지는 구석과 막 떠난 옆자리의 남은 온기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소실점 건성건성 지나는 저녁 해와 푸른 공기 더 푸르게 기우는 줄무늬의 골목 서쪽 베란다 걷지 않은 빨래와 피가 마르는 꽃바구니 쯧쯧쯧 냉장고에서 겉도는 쭈그렁사과가 되어 탁 탁 손을 털고 가는 먼발치가 되어 라고를 생각했다
나는 라고를 위해 라고를 생각했다 사소하기도 하고 더 사소하기도 한 너를 위해 라고를 생각했다 너는 돌아오지 않는데 네게 보낼 말을 고르는 무심함으로 라고를 생각했다 애면글면 라고를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사코 갸웃하는 한사코 네 안으로 갸웃하는 라고를 생각했다 너는 돌아오지 않고 라고를 생각했다
-계간《문예바다》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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