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음 시인 / 찔레 극장
찔레는 벤치를 중심으로 핀다 수건 돌리기 하듯 빙빙 돌아가며 핀다 멀리 벌판이 달려오지만 공허한 배경일 뿐 지금은 찔레의 시간, 세상은 잠시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 오른다 빛을 따라 흰잠이 쏟아지는 하오. 찔레가 피었어, 라고 전화하는 순간에도 찔레는 하얗게 피고 있다 지고 있다 저 흰 빛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잠시 질문을 쥐고 있다
벤치의 허공에 앉아 찔레의 숨소리 듣는다 찔레는 순하고 말이 없는 꽃, 어려서 죽은 영숙이처럼 슬픈 꽃. 흰 옷을 입은 정령들이 서성거린다 너 누구니? 이곳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다 새로워지고 있다 흰 빛에 갇혀 있는 동안 휘몰아쳐 오는 것이 있다 오로지 백색의 명령을 수납한 꽃이 펄펄 한여름의 눈보라에 들어갔다 백 년의 시간이 아무렇지도 않다
희고 추운 피안의 여름이 날카롭다
계간 『다층』 2021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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