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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음 시인 / 찔레 극장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8.

손음 시인 / 찔레 극장

 

 

 찔레는 벤치를 중심으로 핀다 수건 돌리기 하듯 빙빙 돌아가며 핀다 멀리 벌판이 달려오지만 공허한 배경일 뿐 지금은 찔레의 시간, 세상은 잠시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 오른다 빛을 따라 흰잠이 쏟아지는 하오. 찔레가 피었어, 라고 전화하는 순간에도 찔레는 하얗게 피고 있다 지고 있다 저 흰 빛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잠시 질문을 쥐고 있다

 

 벤치의 허공에 앉아 찔레의 숨소리 듣는다 찔레는 순하고 말이 없는 꽃, 어려서 죽은 영숙이처럼 슬픈 꽃. 흰 옷을 입은 정령들이 서성거린다 너 누구니? 이곳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다 새로워지고 있다 흰 빛에 갇혀 있는 동안 휘몰아쳐 오는 것이 있다 오로지 백색의 명령을 수납한 꽃이 펄펄 한여름의 눈보라에 들어갔다 백 년의 시간이 아무렇지도 않다

 

 희고 추운 피안의 여름이 날카롭다

 

계간 『다층』 2021년 여름호 발표

 

 


 

손음(孫音) 시인

경남 고성에서 출생. 본명 손순미. 1997년《부산일보》신춘문예와 《현대시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칸나의 저녁』과 연구서 『전봉건 시의 미의식 연구』가 있음. 제11회 부산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