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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우진 시인 / 배나무를 베지 말아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8.

한우진 시인 / 배나무를 베지 말아라

 

 

아버지는 북쪽을 보게 해달라고 했다

베지 말아라, 그래도 배나무는 베지 말아라

비료 공장이 저만치 서 있고 거기

가물거리는 남한강이 들락날락

별스럽게 새떼가 뒤덮여 가로거칠지라도

 

목행(牧杏), 유명(遺命)처럼

북향의 진달래가 드문드문 피는 그 곳

내가 13평짜리 공원묘지를 사들고 온 날

아버지는 편지를 써두라고 하였다

성천강은 잘 있겠지, 야윈 만세교를 더듬거려

꿈에 반룡산이 (젖꼭지라도 내) 보이면 당장

치마대를 향해 편지를 날릴 거라고 했다.

 

내가 갈 때마다

아버지는 흥건히 젖은 채 나와 있다

땀이 마르는 북쪽으로 가부좌를 틀고

내가 가기만 하면 아버지는

죽은 게 아니고 살아 있다

베지 말아라, 배나무를 베지 말아라

 

물 다음에 구름,

실향 다음에 아버지

 

북쪽에 살아 있을 셋째 형, 넷째 형

젖었거나 바짝 마른 누이들

까치발로 낯선 남쪽을 바라보고 있을까

물 다음에 구름,

자식 다음에 귀향

그들에게 아버지의 유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배나무를 베지 말아라

배나무를 베지 말아라

 

구름이 좀 끼면 어떠냐 휘어지면 어떠냐

펄럭이는 깃발처럼 아버지는

북쪽, 하늘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했다

 

 


 

 

한우진 시인 / 쥘 쉬페르비엘

 

 

벅찬 하늘의 동사動詞

 

사라진 방광과 척추의 이야기를

동사만으로 써내는

구름 시인

 

가벼운 것에 몰두하는

물리 선생

 

찰나의 스케이팅

스피드를 기록하는 책

 

 

불타는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재가 되지 않는 문장

 

 


 

한우진 시인

충북 괴산에서 출생. 2005년 《시인세계》 신인상에〈겨울의 유서〉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까마귀의 껍질』(2010, 문학세계사)가 있음. 2007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기금과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