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진 시인 / 배나무를 베지 말아라
아버지는 북쪽을 보게 해달라고 했다 베지 말아라, 그래도 배나무는 베지 말아라 비료 공장이 저만치 서 있고 거기 가물거리는 남한강이 들락날락 별스럽게 새떼가 뒤덮여 가로거칠지라도
목행(牧杏), 유명(遺命)처럼 북향의 진달래가 드문드문 피는 그 곳 내가 13평짜리 공원묘지를 사들고 온 날 아버지는 편지를 써두라고 하였다 성천강은 잘 있겠지, 야윈 만세교를 더듬거려 꿈에 반룡산이 (젖꼭지라도 내) 보이면 당장 치마대를 향해 편지를 날릴 거라고 했다.
내가 갈 때마다 아버지는 흥건히 젖은 채 나와 있다 땀이 마르는 북쪽으로 가부좌를 틀고 내가 가기만 하면 아버지는 죽은 게 아니고 살아 있다 베지 말아라, 배나무를 베지 말아라
물 다음에 구름, 실향 다음에 아버지
북쪽에 살아 있을 셋째 형, 넷째 형 젖었거나 바짝 마른 누이들 까치발로 낯선 남쪽을 바라보고 있을까 물 다음에 구름, 자식 다음에 귀향 그들에게 아버지의 유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배나무를 베지 말아라 배나무를 베지 말아라
구름이 좀 끼면 어떠냐 휘어지면 어떠냐 펄럭이는 깃발처럼 아버지는 북쪽, 하늘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했다
한우진 시인 / 쥘 쉬페르비엘
벅찬 하늘의 동사動詞
사라진 방광과 척추의 이야기를 동사만으로 써내는 구름 시인
가벼운 것에 몰두하는 물리 선생
찰나의 스케이팅 스피드를 기록하는 책
새
불타는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재가 되지 않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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