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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하 시인 / 우산고로쇠나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9.

서하 시인 / 우산고로쇠나무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말라붙은 가슴과 배꼽 사이에 구멍 뚫어 비닐호스를 심었다 새 몇 마리 날아간 자글자글한 배에 무슨 긴 탯줄 같다 막 태어난 비닐주머니가 젖을 빨고 있다 비밀처럼 아직도 빨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울퉁불퉁한 수술자국 위에 담즙꽃이 피었다 휴전선 어느 구멍난 철모에서 올라온 들꽃 같다

 

물풍선 같은 아침 해가 뜨면 비닐장갑을 낀 간호사가 밤새 뜬눈으로 지샌 수액을 데리고 가서 몸무게를 잰다 때로는 그리움도 저리 잴 수 있다면 별이 서너 말은 들어 있겠지

 

고로쇠나무 가지가 낮달을 꿰뚫었는지 오늘은 별이 길 떠나는 소리처럼 자분자분 비가 내린다 우산도 없이 여인의 단벌 검버섯이 고요히 젖는다 비는 세상에서 가장 긴 꼬리, 썩은 속을 다 파냈는지 지평선처럼 착해진 여인, 무른 몸의 마려움 밀어내며 꼬리 긴 빗방울로 새움을 틔우는 중일까

 

 


 

 

서하 시인 / 사과꽃

 

 

할아버지 제삿날 삼촌이 사과를 깎는다

동짓달 긴긴 밤의 테두리 살살 돌려 깎을 때

삼촌 턱 밑에서 길게 목 빼고 앉아

껍질이 두껍든 얇든 잡아끌어 입으로 빨아들이는 동안

입 안 가득 사과꽃이 오물오물 피어났지

바람에 꽁지 드는 새처럼 입꼬리 쫑긋 올라가면

텅 빈 뱃구레 돌아나오는 종소리

일생 이렇게 새콤한 날, 며칠이나 될까?

삼촌 거친 숨소리 따라 밤공기 휘청 휘어지고

별빛이 내 이마 때릴 때

누군가에게 그늘 지고 있다는 것 왜 몰랐을까?

끈질기게 잡아당긴 것이 명줄이었나

알러지성 발진처럼 돋아난 마흔 살 그늘 밟으며

풋사과처럼 툭 떨어진 삼촌

용산못 쓰다듬는 바람따라

올봄에도 사과밭 근처 도롱골 돌려 깎는지

감겨있던 샛길, 하르르 하르르 풀린다

 

*2012년 봄호 수성문화

 

 


 

 

서하 시인 / 동백꽃

 

 

언제부턴가 그가 낯설다는

내 안에 그가 이젠 그가 아니라는

부탁하듯 심지 돋우는 동박새 울음소리 물고 있는

저 혼자 몸 달아오른 햇살도 물고 있는

기척도 모르고 또 한 치 자라난 돌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벼랑에 입술 꽉 깨물고 피어 있는

 

*문학에스프리 2012년 봄 창간호

 

 


 

서하(徐河) 시인

경북 영천에서 출생. 1999년 계간 《시안》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아주 작은 아침』 『저 환한 어둠』이 있음. 현재 한국 시인협회 회원, 대구시협 이사, 대구문협 회원.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 2015년 제33회 대구문학상. 2020년 제1회 이윤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