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 시인 / 우산고로쇠나무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말라붙은 가슴과 배꼽 사이에 구멍 뚫어 비닐호스를 심었다 새 몇 마리 날아간 자글자글한 배에 무슨 긴 탯줄 같다 막 태어난 비닐주머니가 젖을 빨고 있다 비밀처럼 아직도 빨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울퉁불퉁한 수술자국 위에 담즙꽃이 피었다 휴전선 어느 구멍난 철모에서 올라온 들꽃 같다
물풍선 같은 아침 해가 뜨면 비닐장갑을 낀 간호사가 밤새 뜬눈으로 지샌 수액을 데리고 가서 몸무게를 잰다 때로는 그리움도 저리 잴 수 있다면 별이 서너 말은 들어 있겠지
고로쇠나무 가지가 낮달을 꿰뚫었는지 오늘은 별이 길 떠나는 소리처럼 자분자분 비가 내린다 우산도 없이 여인의 단벌 검버섯이 고요히 젖는다 비는 세상에서 가장 긴 꼬리, 썩은 속을 다 파냈는지 지평선처럼 착해진 여인, 무른 몸의 마려움 밀어내며 꼬리 긴 빗방울로 새움을 틔우는 중일까
서하 시인 / 사과꽃
할아버지 제삿날 삼촌이 사과를 깎는다 동짓달 긴긴 밤의 테두리 살살 돌려 깎을 때 삼촌 턱 밑에서 길게 목 빼고 앉아 껍질이 두껍든 얇든 잡아끌어 입으로 빨아들이는 동안 입 안 가득 사과꽃이 오물오물 피어났지 바람에 꽁지 드는 새처럼 입꼬리 쫑긋 올라가면 텅 빈 뱃구레 돌아나오는 종소리 일생 이렇게 새콤한 날, 며칠이나 될까? 삼촌 거친 숨소리 따라 밤공기 휘청 휘어지고 별빛이 내 이마 때릴 때 누군가에게 그늘 지고 있다는 것 왜 몰랐을까? 끈질기게 잡아당긴 것이 명줄이었나 알러지성 발진처럼 돋아난 마흔 살 그늘 밟으며 풋사과처럼 툭 떨어진 삼촌 용산못 쓰다듬는 바람따라 올봄에도 사과밭 근처 도롱골 돌려 깎는지 감겨있던 샛길, 하르르 하르르 풀린다
*2012년 봄호 수성문화
서하 시인 / 동백꽃
언제부턴가 그가 낯설다는 내 안에 그가 이젠 그가 아니라는 부탁하듯 심지 돋우는 동박새 울음소리 물고 있는 저 혼자 몸 달아오른 햇살도 물고 있는 기척도 모르고 또 한 치 자라난 돌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벼랑에 입술 꽉 깨물고 피어 있는
*문학에스프리 2012년 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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