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류현 시인(女) / 다들 와 있는 여기쯤에서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9.

류현 시인(女) / 다들 와 있는 여기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무엇이 잘려 나간지 보았다

당신이 얼려 놓은 겨울이 아주 조금 녹는다

 

토끼풀과 개망초를 뜯어 화관을 만들던 너는

13번 버스를 타고 밤새도록 달려도 달의 종점을 찾지 못한다

 

얼마나 남았을까

버려도 좋을 꿈까지 가려면

덜컹거리는 모퉁이마다 뜨거운 낙서를 쏟아 내고

텅 빈 정류장에서 발을 놓친다

 

잘려 나간 머리카락까지 산책을 갔다

아직 덜 마른 건초더미에 당신이 누워 있다면

함께, 어둠이 무성한 밤을 기다려야 할까

왼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머리를 넘긴다

 

머리카락의 길이에 전부를 거는 것은

지병의 일,

몇 년을 하루에 살아내는 일이다

 

달의 트랙이 희미해지고

누군가 너를 스쳐가는 것은

겨울 밑으로 발을 넣고 향수병을 앓는

당신을 잊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들 와 있는 여기쯤에서 손을 놓을 것이다

 

계간 『문예바다』(2019년 가을호, 공모시)

 

 


 

류현 시인

2018년 《시작》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