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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준옥 시인 / 저녁의 질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9.

노준옥 시인 / 저녁의 질투

 

 

이제는 모르는 말을 할 시간

 

오래 감추어둔 너의 말을 꺼내렴

 

눈썹 그늘 밑으로 구름은 지나가고

 

어린 염소는 두 번 울고 갔다

 

접시에 목단꽃을 부치고

 

뜨거운 바늘로 뜨개질을 하렴

 

입술이 부풀어 오른 기억이 물을 찾는 시간

 

한 뜸 한 뜸

 

숨 막힌 꽃이 오고 있다

 

 


 

 

노준옥 시인 /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열 달이 열 번 지나고 십 년이 열 번이 지났는데도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깜빡깜빡 눈도 생기고 머리카락도 생겼는데,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손발도 생기고 손톱 발톱도 다 만들어졌는데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나는 숨도 못 쉬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데

이 아기는 내 심장에 들러붙어 할딱인다

양수는 터져 다 흘러가버렸다

자궁은 문이 닫혀버렸다

이 아기는 이제 더 이상 크지 않는다

이 아기는 울지 않는다

이 아기는 웃지도 않는다

이 아기는 말도 못하고 노래도 부르지 못한다

이 아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 아기는 날마다 나를 빨아먹고 잠을 잔다

탯줄을 감아쥐고 물끄러미 날 쳐다본다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열 달이 열 번 지나고 십 년이 열 번 지나도

이 아기는 도대체 나오려 하지 않는다

 

<시와 사상> 2005년 겨울호

 

 


 

노준옥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단국대 영문과 졸업, 2001년 《시와 사상》을 통해 <나는 그녀를 연구한다>로 등단. 현재 『시와 사상』 편집장. 시집으로 『모래의 밥상』(시와사상, 2011)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