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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석호 시인 / 골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9.

손석호 시인 / 골목

 

 

사는 게 골목이라면

빨리 걸어 들어가고

아주 천천히 돌아 나올 수도 있겠지

힘들 때 한 번쯤 열린 대문 앞에 걸터앉아 쉴 수도 있고

어디쯤일까

물어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기웃거렸던 마흔 즈음의 낯선 골목들

걸음마다 삐걱거리며

너라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라는 골목에서 늘 너만 빠져나갔다

힘겹게 구부러질 때마다

바람도 돌아 나가는 막다른 어느 모퉁이

목구멍에 걸린 무언가를 억지로 뱉어 내기 위해

선 채로 컥컥거렸다

후미진 골목 같은 나를 삐뚤삐뚤 돌아 나오며

어느 골목이든

들키고 싶지 않은 눈물이 있고

그곳에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고장 난 가로등이 있는 이유를

고장 난 가로등의 꺼진 시간이 더 긴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손석호 시인 / 기생충

 

 

우주의 구석, 푸른 눈 깊숙이 숨어

꿈틀꿈틀 걸어가고 있으니

정직한 굴종이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신은 낮고 반듯하지만

이 세계의 고개는 높고 구불구불합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숨차요

아침마다 고개 아래 같은자리에서 멈춥니다

근엄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계단들

우리는 매번 어제보다 조금 더 낮아 있고

질러갈 수 있는 계단 자리는 쟁취할 수도 있지만

대개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죠

채찍을 들고 한 칸 한 칸 걸어 내려오는 햇볕이 도달하기 전에

고개 오르길 포기하고 터널 속으로 숨어야 합니다

햇볕에 약한 종족이거든요

다행히 계단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터널과 연결되어 있어

기어들기 쉬워요

삶을 가능한 긴 이야기로 엮기 위해

미끄러운 시간의 꼬리를 어금니로 악물고

눈치 채지 못하게 단단하게 묶어야 합니다.

눈물 같은 걸 흘릴 수도 있어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걸 막으려면 가능한 몸을 구불구불하게 꼬는 게 안전하죠

푸른 눈 속 습윤을 빨며 꾸는 눅눅한 꿈이 익숙하기도

가끔 포기한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요

신께 따신 한 끼를 내미는 흉내를 내곤 하지만

똑같은 하루하루가 점액질처럼 미끈거리네요

멀리 터널 끝이 보이지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냥 여기 머물래요

긴 이야기는 어디서 잘릴지 모르지만

다시 푸른 눈 속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눈감아준다면

내가 제일 어두운 날

몰래 터널을 빠져나와 블랙홀 앞에 버려두고 올래요.

 

 


 

손석호 시인

경북 영주 출생. 1994년 <공단문학상> 최우수상 수상 이후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 현재 문학동인 〈Volume〉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