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호 시인 / 골목
사는 게 골목이라면 빨리 걸어 들어가고 아주 천천히 돌아 나올 수도 있겠지 힘들 때 한 번쯤 열린 대문 앞에 걸터앉아 쉴 수도 있고 어디쯤일까 물어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기웃거렸던 마흔 즈음의 낯선 골목들 걸음마다 삐걱거리며 너라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라는 골목에서 늘 너만 빠져나갔다 힘겹게 구부러질 때마다 바람도 돌아 나가는 막다른 어느 모퉁이 목구멍에 걸린 무언가를 억지로 뱉어 내기 위해 선 채로 컥컥거렸다 후미진 골목 같은 나를 삐뚤삐뚤 돌아 나오며 어느 골목이든 들키고 싶지 않은 눈물이 있고 그곳에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고장 난 가로등이 있는 이유를 고장 난 가로등의 꺼진 시간이 더 긴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손석호 시인 / 기생충
우주의 구석, 푸른 눈 깊숙이 숨어 꿈틀꿈틀 걸어가고 있으니 정직한 굴종이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신은 낮고 반듯하지만 이 세계의 고개는 높고 구불구불합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숨차요 아침마다 고개 아래 같은자리에서 멈춥니다 근엄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계단들 우리는 매번 어제보다 조금 더 낮아 있고 질러갈 수 있는 계단 자리는 쟁취할 수도 있지만 대개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죠 채찍을 들고 한 칸 한 칸 걸어 내려오는 햇볕이 도달하기 전에 고개 오르길 포기하고 터널 속으로 숨어야 합니다 햇볕에 약한 종족이거든요 다행히 계단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터널과 연결되어 있어 기어들기 쉬워요 삶을 가능한 긴 이야기로 엮기 위해 미끄러운 시간의 꼬리를 어금니로 악물고 눈치 채지 못하게 단단하게 묶어야 합니다. 눈물 같은 걸 흘릴 수도 있어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걸 막으려면 가능한 몸을 구불구불하게 꼬는 게 안전하죠 푸른 눈 속 습윤을 빨며 꾸는 눅눅한 꿈이 익숙하기도 가끔 포기한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요 신께 따신 한 끼를 내미는 흉내를 내곤 하지만 똑같은 하루하루가 점액질처럼 미끈거리네요 멀리 터널 끝이 보이지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냥 여기 머물래요 긴 이야기는 어디서 잘릴지 모르지만 다시 푸른 눈 속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눈감아준다면 내가 제일 어두운 날 몰래 터널을 빠져나와 블랙홀 앞에 버려두고 올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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