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준옥 시인 / 저녁의 질투
이제는 모르는 말을 할 시간
오래 감추어둔 너의 말을 꺼내렴
눈썹 그늘 밑으로 구름은 지나가고
어린 염소는 두 번 울고 갔다
접시에 목단꽃을 부치고
뜨거운 바늘로 뜨개질을 하렴
입술이 부풀어 오른 기억이 물을 찾는 시간
한 뜸 한 뜸
숨 막힌 꽃이 오고 있다
노준옥 시인 /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열 달이 열 번 지나고 십 년이 열 번이 지났는데도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깜빡깜빡 눈도 생기고 머리카락도 생겼는데,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손발도 생기고 손톱 발톱도 다 만들어졌는데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나는 숨도 못 쉬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데 이 아기는 내 심장에 들러붙어 할딱인다 양수는 터져 다 흘러가버렸다 자궁은 문이 닫혀버렸다 이 아기는 이제 더 이상 크지 않는다 이 아기는 울지 않는다 이 아기는 웃지도 않는다 이 아기는 말도 못하고 노래도 부르지 못한다 이 아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 아기는 날마다 나를 빨아먹고 잠을 잔다 탯줄을 감아쥐고 물끄러미 날 쳐다본다 이 아기는 나오려 하지 않는다 열 달이 열 번 지나고 십 년이 열 번 지나도 이 아기는 도대체 나오려 하지 않는다
<시와 사상>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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