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훈 시인 / 먼 곳
내 몸의 가장 먼 곳이 아픈 것은 내 마음의 가장 먼 곳이 아픈 까닭이다
내 마음의 가장 먼 곳에 가서 하루 종일 간병했더니 내 몸의 가장 먼 곳이 나았다
그 마음의 먼 곳에서 몸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또다시 마음의 먼 곳이 생겨났다 나는 또 머지않아 몸의 가장 먼 곳이 아파올 것을 예감한다
좀처럼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이 있어서 나는 오늘도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마음을 살아간다 내 몸의 가장 먼 곳에도 곧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릴 것이라는 마음의 일기예보를 예의 주시하는 오늘 반도 깊어 간다
권성훈 시인 / 고비의 시간
지나온 날들을 모두 어제라 부르는 곳이 있다 염소처럼 족보도 지금 눈에 있는 어미나 새끼도 전부 지나간 시간들이 모두 무로 돌아간 공간을 보며 살아가는 황막한 고비에서는 그 이상의 말을 생각할 그 무엇도 까닭도 없으므로
남은 날들을 모두 내일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펌프가 있는 어느 작은 마을 사람이라곤 물을 길어 가는 만삭 아낙과 뒤따라가며 가끔 돌아보는 소녀뿐 시간이 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황황막막한 고비에 서는 굳이 그 이상의 말을 만들 어떤 필요도 없으므로
권성훈 시인 / 푸른 물방울
내가 살아가는 지구는 우주에 떠 있는 푸른 물방울
나는 아주 작은 한 방울의 물에서 생겨나 지금 나같은 우주 우스꽝스럽고 조금 작은 한 방울의 물로 살다가 다시 아주 작은 한 방울의 물로 돌아가야 할 나는 나무 물방울 풀 물방울 물고기 물방울 새 물방울 혹은 나를 닮은 물방울 방울 세상 모든 물방울들과 함께 거대한 물방울을 이루며 살아가는
나는, 지나간 어느날 망망대해 인도양을 건너가다 창졸간에 문득 지구는 지구가 아니라 수구水球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끝없는 우주를 떠도는 푸른 물방울 하나
권성훈 시인 / 촛불
어둠 속에서는 절대 몸을 숨기지 않는다
이 불로 꽃을 피우면 향기가 난다 백만 마리 천만 마리 나비가 날아와 앉을수록 향기를 더해가는 특성을 지녔다
이 불꽃은 절대 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으로 옮겨 가며 피어나는 불멸의 특성도 함께 지녔다
지지 않는 불꽃이지만 뜨거운 열매를 맺는다 뜨거운 눈물을 흘려 본 사람들의 몫이다
그 불로 피운 꽃은 아무리 많은 나비가 날아들여 노닐어도 단 한 마리의 날개조차 그을린 적 없다 백만 송의 천만 송이 불꽃도 오직 한 떨기로 핀다
밝음과 때를 같이하여서는 겸허하게 몸을 물릴 줄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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