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환 시인 / 동백
바위 끝에 매달려 있던 동백을 품었어
너는 시들지 않을 것 같았어 너는 저물지 않을 것 같았어 너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어
파도도 둘레객도 먼발치서 발걸음 죽이던 무슨 적요 같은 너를 보면 이제 먼 곳이 더 잘 보이는 내 나이도 알고 있을 것 같은 너를 보면 제 무릎 아래 파도소리 엿듣던 어떤 여자의 귓바퀴 같은 너를 보면
갈매기도 꽃이었어 동백섬도 꽃이었어 그게 동백꽃이었어
안개 더미 휘장을 슬며시 걷어내면 또 속았어 어쩔 수 없었어 낚였어
너는 마지막 남은 꽃이었어 너무했어 눈물이 났어
가슴 언저리에 덥석 얹힌 이 붉은 미열(微熱)!
『앞마당에 그가 머물다 갔다』,강세환 , 실천문학사
강세환 시인 / 봄비
우리는 무슨 적이든 적을 갖고 있다 ― 김수영, 「적 1」에서
오늘도 나는 나의 적을 향해 가고 있다 적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늘도 나의 적을 위해 가고 있다 적을 위해 사는 것 같다 나는 너무 많은 적을 두고 살았다 적은 적을 낳고 또 적은 적을 낳고 마침내 적은 나를 낳았다
적이 보이지 않는 날이면 남의 적을 갖다 내 적으로 만들었다 나의 적도 없고 남의 적도 없는 날 나는 내가 나의 적이 되었다 나는 나의 적이 되어 나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나의 적이 되어 나를 위해 살고 있었다 많은 적들이 나를 위해 있었다 많은 적들이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오직 적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적들은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 나만 적들을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많은 적들은 나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적들이 나를 생각하지 않아도 나는 적들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봄비가 내리던 밤 나는 이제 단 하나의 적만 두고 다 갖다 버렸다 나는 많은 적들을 다 갖다 버렸다 나는 나도 다 갖다 버렸다 나는 이제 단 하나의 적을 향해 가고 있다 단 하나의 적을 위해 살고 있다 -나에게 남은 저 마지막 적은 누구인가 봄비 봄비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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