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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혜연 시인 / 당신의 당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9.

문혜연 시인 / 당신의 당신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

원래 인간은 제 이름보다 남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는 종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이름을

새들에게 우리는 우리일까요

 

우리를 대신할 말을 찾아요

수많은 단어들이 사라져요

뻐끔거리던 입술들이 짝을 짓습니다

입술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옮아가는 인간들

새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날아다닙니다

새들은 새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부리를 부딪치는 새들은

정다운 만큼 가벼운가 봐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세 번 만나면 죽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지렁이와, 지렁이 모양 젤리

그걸 공포라 할 수 있나요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젤리는

달콤하고 모호한, 주인 모를 관계들

우리는 점점 닮아 가는데

누가 누굴 닮은 건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지금

2%의 당신 자신과, 98%의 당신의 당신

순도 높지 않은 당신, 그리고 나

끝 모를 바닥으로 가라앉아요

 

새들은 언제나 아득한 높이에서 웁니다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물에는

새의 밑면만 지나갑니다

깊이 가라앉은 바닥, 그곳에서 우리는

떠오를 수 없는 낮은 음, 낮은 울음

 

새들의 이름은 그들의 인사가 됩니다

우리의 울음도 우리의 내일이 될까요

안녕, 당신, 안녕

유언 같은 안부를 주고받아요

우리는 새들의 세계에서도, 서로의 이름만 부르고

인간은 역시, 새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없나봅니다

 

 


 

문혜연 시인 / ​아무도 모르고 누구나 아는

 

 

오늘 밤은 공기에서 종이 냄새가 나요

나뭇잎들이 가장 예쁠 때

젖은 몸을 던지는

 

어떤 새의 발톱은

나무를 붙들기 위해서만 쓰인다던데

 

나무들은 대체 언제부터

밤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을까요

깊이도 무게도 알 수 없는

둥지 하나를 매단 채로

 

손목에 새를 새긴 아이는

밤새 손목이 두근거려서

밤을 없애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이 밤을 마지막으로

 

밤이 사라진 세계에는

실수가 없고 꿈이 없어서

나무들이 하얗게 세어 버린다고

 

노인이 아이의 등을 쓸어줍니다

아이는 자신의 온 등으로

노인의 나무껍질 같은 손바닥을 느끼고

가끔 둥글고 뜨거운 것이 내려가고

 

새를 잃어버린 어른들은

숲에 말간 얼굴을 감춰요

나무는 점점 더 희고 묽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이곳은 흰 나무들의 숲

젖은 종이 냄새가 나요

훗날 발견될 글자처럼

 

새를 주운 아이는

손안의 심장이 뛰는 리듬을 잊지 못합니다

지그시 눌러보면 두근거리는

 

돌아갈 밤이 없는 아이는

둥지를 더듬습니다 까치발로

새들의 둥근 어둠을 훔치고

 

흰 나무에 남은 줄무늬 같은

흔적만이 그 밤을 기억합니다

노인은 자기 손바닥을 쓸어보며

작은 등 하나를 기억하고요

 

아이가 사라진 세계는

붙잡혀본 적 없는 손목들만 남아서

긴 소매 속으로 자라나는 어둠

 

낮과 낮과 낮의 사이로

문득 겨울이 옵니다

떠나거나 떠나지 않거나 그렇게

때를 놓친 새들은 살아가는데

 

 


 

 

문혜연 시인 / 오늘의 요리

 

 

당신과 나는 검디 검은 얼굴의 유령처럼 우리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더 검고 어두운 집의 내부

 

각자의 무게에 맞게 가라앉은 소파

당신이 앉으면 나는 일어나 냉장고를 엽니다

저녁이 늦었어요

 

오늘의 요리는 가지무침이에요

당신도 나도 가지를 싫어하지만

그래서 지금껏 미뤄왔지만

가지를 깨끗이 씻어 조각내면 나무 도마에 보랏빛 물이 들어요

꼭 멍든 등 같아서 잠시 바라봅니다

 

당신은 턱 끝까지 어둠에 잠겨 있고 물이 끓으면 가지를 넣고 5초를 세요

5 4 3 2 1 땡

실은 5초가 아닌 언제나 남은 땡의 시간 잘못과 다정함이 함께하는

 

단단하던 가지가 물렁해집니다

가지를 익힐수록 영양소가 파괴된다고 토마토 설탕 절임처럼 잘못 먹고 있다고 아주 오래전 당신이 말해줬는데

 

잘못은 말하지 않기로 해요

모든 걸 영양소를 잃은 가지에 떠넘기고 말없이 흰 밥만 씹는 저녁을 지나 단내 나는 입으로 이불에 눕습니다

 

어쩌다 포개진 다리가 저려오지만 함부로 뒤척일 수 없는 새벽 이불은 점점 푸르게 물이 들고요

가지는 몇 번이고 냉장고를 오갈 겁니다

 

조금씩 더 짙어지는 등으로

 

월간 《현대시》 2020년 12월호

 

 


 

 

문혜연 시인 / 커튼

 

 

 아내는 커튼이 되었다. 오래도록 표정이 없던 아내는 문득 아름다웠고, 순간 무수히 넓어졌다. 마지막 기억 속 아내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때로는 뒷목을 쓰다듬으며, 쏟아지는 빛 앞에서 아내는 잠시, 그림 속 여자 같았는데,

 

 고요가 번지자 어둠이 가득했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창밖으로 휘날리는, 떠날 듯 떠나지 않는, 커튼을 걷을 수 없었다. 커튼이 진짜 커튼인지, 아내의 뒷모습인지, 그냥 너울거리는 커튼 그림인지. 커튼 뒤의 풍경, 나무들은 뿌리부터 창백한 표정. 커튼을 걷으면 유령이, 투명한 아내의 사라진 발목이, 커튼을 걷으면, 아무것도, 커튼이 곧, 벽이었을까 봐,

 

 창문을 가득 덮은 아내의 얼굴. 나는 오래 그 앞에 서 있었다. 벌을 받듯 손을 들고, 커튼을 붙잡았다. 부드러운 천. 오돌토돌하게 솟구치고 파고드는 실의 물결. 나는 커튼을 붙잡고 울었다. 두 손에서 일렁이는 따뜻한 파도. 아내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 뒤는, 알 수 없는 곳.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늘. 거대한 눈꺼풀처럼 방과 밤, 세계를 덮는 커튼. 아내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오래도록 거기에 있었다.

 

2019년 신춘문예 당선 시집에서

 

 


 

 

문혜연 시인 / 양 떼 구름

 

 

아니라고 말하면

꼭 그러고 싶어지는 기분으로

오늘의 운세를 봅니다

 

모두 비슷해 보이는 말 속에

저마다 명확한 방향이 있어요

동쪽에서 귀인, 뒤통수를 주의,

같은 말들로 조심스러운 하루

 

양띠들은 모두 동쪽으로 갑시다

무리에서 떨어진 양은

본 적 없는 귀인 대신 늑대를 만날까요

 

그림자를 조금씩 부풀려

사라진 양의 자리를 채우고

허락과 금기 사이에서

풀을 질겅이며 우는 양들

 

양들이 지나간 자리에

풀이 자라는 상상을 합니다

뜯겨나간 모양대로 자라서

천천히 한 방향으로만 흔들리는

 

양들은 늙기도 전에 흰 털이 자라니까요

잘못도 하기 전에 잘못한 기분이 들 때

 

전화가 한 통 잘못 걸려옵니다

저는 그 사람은 아닙니다만

실례지만 저로는 안 되는 걸까요

 

끊긴 전화 너머 신호음 대신

양 울음소리 메에에 하고 들려옵니다

 

<시인동네> 2020년 1월호

 

 


 

문혜연 시인

1992년 제주 출생. 201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동 대학원 석사 졸업.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