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호 시인 / 치자꽃
머리 깎은 스무 살 청춘이 현관문 열어놓고 등 돌린 열차처럼 인사하고 가더니 아득히 구름 낀 산 너머로 입고 간 옷과 신발을 던져 보내왔다 걱정마세요, 그때까지 기다리세요 몇 자 적은 편지도 그 안에 숨어서 왔다 고개 숙이면 뜰 안 구석마다 물컹물컹 남아있는 물봉선 터진 잎사귀도 따라서 왔다 아내는 스무 살 깎은 머리 쓰다듬으며 흘리던 치자꽃송이들을 주워서 말라버린 젖가슴 안에 채곡채곡 집어넣는다 오늘 밤 치자꽃이 그녀의 들판에 달빛처럼 가득 피면 너울너울 산 넘어서 달려오는 눈먼 맨발을 보게 될 것이다
석정호 시인 / 언제나 샌드위치를 만드는 당신
왜 이리 아프냐! 통증이 몸을 뚫고나와 복도에 뒹굴고 있다 당신이 아이들에게 줄 빵을 굽고 있는 동안 공장의 프레스는 나의 손가락 네 개를 잘라 갔다
네 조각의 도마뱀 꼬리가 바닥에서 튈 때 아이들의 샌드위치는 네 등분이 되고 분홍 혓바닥 위에서 부드러운 입맞춤을 마쳤을까 아이들이 비눗방울을 띄우는 거실에서 당신이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안 구급차는 토막난 절규의 몸뚱이를 싣고 달렸다
손가락이 없어진 손 항상 쥐어진 주먹 뭉치 숟가락을 들지 못해 밥상을 받고도 망연히 앉아 통증의 가지 끝에 찔릴 때도 옆자리의 환자 가족들이 별사탕 웃음을 서로 주고받을 때도 언제나 당신은 먼 나라의 풍선에 줄을 달고 어디로 가는 중
“이 몰골, 누가 좀 봐주오!”
입을 뚫고 나온 통증 덩어리가 고래고래 나뒹군다 버려진 동굴의 벽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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