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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석정호 시인 / 치자꽃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9.

석정호 시인 / 치자꽃

 

 

머리 깎은 스무 살 청춘이

현관문 열어놓고 등 돌린 열차처럼

인사하고 가더니

아득히 구름 낀 산 너머로   

입고 간 옷과 신발을 던져 보내왔다

걱정마세요, 그때까지 기다리세요

몇 자 적은 편지도 그 안에 숨어서 왔다

고개 숙이면 뜰 안 구석마다 물컹물컹 남아있는

물봉선 터진 잎사귀도 따라서 왔다

아내는

스무 살 깎은 머리 쓰다듬으며 흘리던

치자꽃송이들을 주워서

말라버린 젖가슴 안에 채곡채곡 집어넣는다

오늘 밤 치자꽃이

그녀의 들판에 달빛처럼 가득 피면

너울너울 산 넘어서 달려오는

눈먼 맨발을 보게 될 것이다

 

 


 

 

석정호 시인 / 언제나 샌드위치를 만드는 당신

 

 

왜 이리 아프냐!

통증이 몸을 뚫고나와 복도에 뒹굴고 있다

당신이 아이들에게 줄 빵을 굽고 있는 동안

공장의 프레스는 나의 손가락 네 개를 잘라 갔다

 

네 조각의 도마뱀 꼬리가

바닥에서 튈 때

아이들의 샌드위치는 네 등분이 되고

분홍 혓바닥 위에서 부드러운

입맞춤을 마쳤을까

아이들이 비눗방울을 띄우는 거실에서

당신이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안

구급차는 토막난 절규의 몸뚱이를 싣고 달렸다

 

손가락이 없어진 손

항상 쥐어진 주먹 뭉치

숟가락을 들지 못해 밥상을 받고도

망연히 앉아 통증의 가지 끝에 찔릴 때도

옆자리의 환자 가족들이 별사탕 웃음을 서로 주고받을 때도

언제나 당신은

먼 나라의 풍선에 줄을 달고

어디로 가는 중

 

“이 몰골, 누가 좀 봐주오!”

 

입을 뚫고 나온 통증 덩어리가 고래고래 나뒹군다

버려진 동굴의 벽이 흔들린다

 

 


 

석정호 시인

1955년 경주 출생. 2005년 《월간문학》신인상으로 등단. 《다층》 문학동인. 시집 『밀행』(2011년, 문학의전당). 현재  서울 인창고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