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 시인 / 표류하는 독백
저녁이 늦게 와서 기다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고 저녁이 늦게 와서 저녁 곁에서 훌쩍 커버릴 것 같았다
담장에 기댄 해바라기는 비밀스러웠다 입술을 깨물어도 터져 나오는 씨앗의 저녁
해바라기의 말을 삼킨 나는 담장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물기 없이 늙고 싶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내 말은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이 무거웠다 생의 촉수는 무거운 침묵으로 뿌리내리고
내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등을 쓸어안아야 했다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눈동자에서 글썽이는 걸 알았다면 어떤 죄책감도 담아두지 마라 할 걸 말이 말이 아닌 게 되어 돌아왔을 때 여전히 침묵하지 마라 할 걸
저녁은 저녁에게 총구를 겨누고 저녁의 총구에서 검은 꽃이 핀다는 걸
저녁이 늦게 와서 알지 못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놀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은하를 건너간 젊은 아버지 등을 떠올렸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나비가 만든 지문을 해독할 수 없었다 핏줄 불거진 손가락에서 누설되지 않은 어둠을 끝내 당기지 못했다
시집 『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달을쏘다, 2021)
강재남 시인 / 아라베스크
비 맞은 가문비나무에 거미줄이 걸렸다 흔들리는 줄마다 문양이 촘촘하다 비를 잃은 구름이 한쪽으로 무너진다 무너진 틈으로 바람이 흩어진다 허공의 지퍼를 한꺼번에 열었다 새떼가 쏟아진다 새의 울음이 어지럽다
새는 함부로 발자국을 찍는다 허공 하나가 사라진다 하나의 허공에서 가문비나무가 흔들린다 막 도착한 엽서에는 블타바 강물이 출렁이고 보헤미아에서 날아온 착하고 날카로운 시간들 헝클어진 나와 울고 있는 새가 교차한다
시집 『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달을쏘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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