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섭 시인 / 스카프의 회고록
나의 스카프는 슬픈 가을 한 장이다 그 스카프 속에는 잘 익은 두어 개의 사랑과 준비하는 이별이 함께 산다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이 있고 시간에 흔들리며 어둠을 푸는 몇 개의 낭만이 있다
나의 스카프는 하얀 눈물 한 방울이다 그 스카프 속에는 내 손금을 닦아주던 강물과 아리아를 불러주던 긴 속눈썹이 산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애증과 달빛이 한 여인의 울음을 비우는 골목이 있다
나의 스카프는 지난여름에 피었던 능소화다 그 스카프 속에는 등이 굽은 세월과 립스틱을 태워버린 홍등가의 백열등이 홀로 산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초가집의 저녁연기와 물집이 돋은 입술로 가난을 물고 있는 유년이 있다
나의 스카프는 철없는 유년의 발자국이다 그 스카프 속에는 푸른 초경의 설렘과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안고 사는 간이역이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지느러미를 흔들며 플렛폼을 벗어나는 완행열차가 있다
2018년 1월호 『심상』 발표작
심은섭 시인 / 수상한 여름
벽에 걸린 시계추가 여섯시를 타종할 때까지 매미는 울지 않았다
어떤 이는 매미가 하안거 중이라고 소리쳤고, 누구는 내장이 훤히 보이도록 허물 벗느 중이라고 했다 그런 풍문이 들릴 때마다 저녁식사 중인 자작나무숲들리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수양버들나무들은 실어중에 시달렸다
말복이 지나도 매미는 울지 않았다 곳간은 텅 비어 갔고 노모의 등뼈마저 허였게 드러났다 하혈하던 닭들도 어둠 속에서 야윈 그믐달을 산란했다 등굣길을 잊어버린 아이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하로 자꾸 발을 뻗었다
매미울음의 실종을 묵인하는 동사무소로 목마른 접시꽃이 갈증을 애원하며 보낸 서신이 되돌아오던 날, 귀가를 서두르던 저녁노을의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았지만 공장굴뚝의 검은 혀들은 여전히 허공에서 군무를 즐긴다
보현사은행나무가 매미의 백일기도를 위해 제단을 쌓고 있다
2020년 『시와세계』 여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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