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방송 2014 신춘문예 당선작 최재영 시인 / 떠도는 부족
말(言)로써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아이의 첫 울음으로 운명의 등고선을 점치고 짐승들의 귀도 처음인 듯 열리던 곳 누대 몸속으로 유전해 온 길이 있어 아슴하니 눈길 닿는 곳까지 획을 그었는지 그들의 생을 축척해도 영역은 가늠되지 않았는데, 몸에 길을 들여 가는 곳마다 부족의 영토는 새로이 확장되곤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좌표를 그렸으므로 어디에도 경계선은 없었으므로 간혹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탯줄의 울림으로 지도의 노래를 배우고 가장 먼 별자리에 방점을 찍어 매일 웅장한 족적을 기록했으리라 모든 문명이 부족을 비껴갔으므로 말(言)의 사원을 짓고 탑을 올렸으리라 무지개를 필사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수백 번 몸으로만 익혀 온 지도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태초 아름다운 지도는 멸실되었으니, 이로써 부족은 떠도는 것들의 기원이 되었다
최재영 시인 / 명옥헌 별자리
원림에 드니 그늘까지 붉다 명옥헌을 따라 운행하는 배롱나무는 별자리보다도 뜨거워 눈이 타들어가는 붉은 계절을 완성한다 은하수 쏟아져 내리는 연못 속 꽃그늘 그 그늘 안에서는 무엇이든 옥구슬 소리로 흘러가고 어디선가 시작된 바람은 낮은 파문으로 돌아와 우주의 눈물로 화들짝 여울져 가는데, 기어이 후두둑 흐드러지는 자미성(微微星) 연못 속으로 어느 인연이 자맥질 해 들어왔나 문이란 문 죄다 열어젖히고 한여름 염천에 백리까지 향기를 몰아간다 그 지극함으로 꽃은 피고지는 것 제 그림자를 그윽히 들여다보며 아무도 본 적 없는 첫 개화의 우주에서 명옥헌 별지리들의 황홀한 궤도가 한창이다 한 생을 달려와 뜨겁게 피어나는 배롱나무 드디어 아무 망설임 없이 안과 밖을 당기니 활짝 열고 맞아들이는 견고한 합일의 연못 눈물겹게,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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