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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정애 시인 / 조지아 오키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31.

허정애 시인 / 조지아 오키프*

― k 선생님께

 

 

 선생님을 뵌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인들을 통해 듣는 소식이 밝지 않으니 늘 웃음을 잃지 않으시던 선생님의 상황이 얼마나 암담한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카쉬가 찍은 오키프의 사진에 붙들려 있습니다.

 

 흑백의 공간, 흙과 모래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 뉴멕시코 아비키우의 집 벽에는 하얗게 육탈된 수사슴의 머리뼈가 장식되어 있고, 말라 비틀린 고목 둥치를 팔걸이로 노년의 오키프가 앉아 있습니다. 자연광을 비스듬히 받고 있는 그녀의 단정한 모습이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나무문과 무척 닮아 보입니다. 검은 벨벳 느낌의 옷소매 끝에 부각된 강인한 듯 섬세한 손이 그녀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키프는 주변의 적대적 시선과 편견, 예술 권력에 맞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오만했지만 정직하게 정념에 몰두했고, 사랑의 파괴력 앞에 정신발작으로 무너지면서도 내면의 힘을 잃지 않았으며, 뉴욕에서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허위로 가득한 삶을 떠나 서부의 황량한 사막으로 이주했습니다.

 

 전망 없는 삶, ‘사유가 비틀대는 마지막 전환점’으로서의 사막에 대해 어떤 이는 ‘사막에서 버티기’를 말하고, 어떤 이는 ‘사막을 건너기’를 말합니다. ‘삶의 이해할 수 없음’에 맞서 반항하거나,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것처럼 희망을 가지고 살아보라는 것이지요. 오키프가 절대고독의 사막에 정착해 예술혼을 불태운 것은 이미 이 모두에 성공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그림 중 <여름날>은 특히 인상 깊습니다. 굽이치는 모래산맥과 청명한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을 배경으로, 허공 가운데 떠있는 수사슴의 머리뼈, 빛무리를 타고 오르는 야생화의 병치가 초현실적입니다. 오키프의 그림들에 대해 선생님과 얘기 나눌 기회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인물사진의 거장으로 불리는 카쉬는 사람들은 누구나 내면에 비밀을 감추고 있고, 사진작가로서 자신의 역할은 드러나지 않는 그 무언가를 포착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진 속 오키프가 흩트러짐 없는 자세로, 무염히 사막의 바람소리에 귀를 대고 있습니다.

 

* Georgia O'Keeffe(1887-1986), 미국 화가

 

계간 『시와 세계』 2011년 겨울호 발표

 

 


 

 

허정애 시인 / 정신현상학을 보다가, tv를 읽다

 

 

 환풍기 수리공에서 일약 슈퍼스타k2의 주인공이 된 청년 허각, 노래 하나로 각종 매체 출연과 수만 명 펜들의 환호를 받게 된 그가 들뜬 표정으로 심경을 말한다.

 

 “나 자신만 제외하고 주변의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건 전처럼 여자친구와 만나고 pc방 가는 거죠.”

 

 그의 자신만 달라지지 않았다는 모순된 의식은 헤겔식으로 말하면 자기의식의 이중화, 한 개체에 대해 대립하는 또 하나의 개체가 등장한 것, 자아가 자신의 반대물에 대립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파악한 것

 

 「이 두 자기의식의 관계는 서로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각기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고 하는 그들 자신의 확실성을 그들 자신의 진리로 고양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 이 생명을 건 투쟁을 통해 자유가 입증된다.」

 

 인간의 모든 당위가 파괴적 자아 분열이나 자기 소멸로 이어지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에서 확보된다면, 이 엄청난 변화에 맞닥뜨린 그는 앞으로 ‘자립적 자기의식이라는 인정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힘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할까.

 

계간 『예술가』 2011년 봄호 발표

 

 


 

허정애 시인

서울여자대학교 졸업. 1999년 《문예사조》를 통해 등단. 시집 『신의 아이들은 춤춘다』(한국문연, 2007)이 있음. 2001년 제1회 짚신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원.국제펜클럽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