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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동확 시인 / 입춘 무렵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31.

임동확 시인 / 입춘 무렵

 

 

그악스럽게 도토리, 상수리를 주워가던 지난겨울에도 살아남은 청설모 새끼 두 마리가 스트로브 잣나무 가지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해발 73M 궁산 공원

 

삭정이로 얼기설기 아카시아나무 우듬지에 엮어놓은 까치집이 마치 시대를 훌쩍 앞서간 예언자처럼 뜻하지 않은 초속 21M 강풍에도 끄떡없이 잘 버텨내고,

 

저마다 혹독한 생존의 비밀을 풀려는 듯 도끼이자 숟갈인 부리를 가진 딱따구리는 선 채로 썩어간 지 오래인 밤나무 둥지를 연신 쪼아대고 있다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짚은 채 정상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할머니가 오르막에서 잠시 눈길을 돌리며 쉬는 동안

 

제주 삼다수 2L병에 담아 연민하듯 뿌려주는 흰 쌀을 거부하듯 멧비둘기 한 마리 노오란 개나리 울타리 그늘 아래 부엽토를 연신 두 발로 파헤치고 있다

 

혼자인 게 두려워 이리저리 떼 몰려다니는 겁 많은 참새들이 사철나무 조팝나무 덤불로 옮겨간 사이

 

앞서 드러나야 할 미래 같은 모습을 한 새매 한 마리 늘 소란한 연둣빛 현재의 지상을 굽어보며 제 먹잇감을 찾고 있다

 

 


 

 

임동확 시인 /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네가 깊고 푸른 심연의 난간에 그나마 성한 영혼의 한 발을 걸친 채 그믐달처럼 매달려 있을 때 내가 사랑한 건 결국 너의 전부가 아닌, 행여 저조차 끝없이 못 믿어온 한낱 난파선 같은 나의 의지

기껏해야 벌써 싸늘해진 기억의 선체를 인양(引揚)하는 일만이 오롯이 너의 몫으로 남아 있을 때 내가 가진 것이라곤 널 최후의 순간까지 지탱해줬을 법한 수평선마저 탕진해버린 시간의 잔해들 그만 네가 신촌 사거리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연신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통곡하고 있었을 때 내가 확신하는 것이라곤 반향 없는 메아리처럼 사라진 너의 뒷등을 오롯이 기억하며 겨우 여기 살아 노래하며 기도하고 있을 뿐 정작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간절하게 부르며 거대한 수압 같은 고독과 마주하고 있었을 때

 

 


 

 

임동확 시인 / 이중섭展

 

 

1.

 

필시 원치 않았을 가난보다

더 지독했을 너의 그리움,

꺾일 줄 모르는 너의 의지가,

아니 그럴수록 예리한 너의 고독이

흰 소처럼 씩씩대며 뒷발을 차고 있다

저를 삼킬 듯 큰 물고기 아가리,

집게발을 가위처럼 벌린 게를 보며

마냥 깔깔대는 벌거숭이 아이들이

환한 배꼽을 드러낸 채 나뒹굴고 있다

 

2.

 

기교마저 생략한 최소한의 면적과

상상을 가둔 최소한의 구도만이

간신히 허락된 너의 적빈(赤貧)이,

그래서 필시 비대칭의 화면이었을

너의 극빈(極貧)이 식솔들을 이끌고

결코 이별 없는 태초의 땅

더 이싱 전쟁도, 가난도 없는

무채색의 하늘을 향해

먼 길을 재촉하고 있다

 

3.

 

굶주려 쭈그러든 위장처럼 맑아서

아무런 색채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은박지,

그래서 깊게 긁힌 세월의 흔적만

덩그러니 선명한 너의 은지화(銀紙畵),

그래서 궁극엔 무두질 된 너의 천진만

본질처럼 남은 영양 결핍의 필선들이

어느새 끈처럼 늘어난 두 팔을 뻗어

한껏 자유로운 공중제비를 돌고 있다

 

 


 

 

임동확 시인 / 솔베이지의 노래

 

 

누군가를 잊지 못할 때 과연 우린 무얼 하는 것일까?

 

뭐라고 말할라치면 그만 사라질까

단지 기억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그래서 더욱 숨 쉬기조차 버겁고 미안한 저녁 광장

생일날이 장례식이 된 작가 없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채 오지 않는 미래엔 제빵사, 배우, 선생, 간호사, 동물학자,

치과의사, 격투기선수와 같은

직업을 꿈꾸었던 차마 부르지 못한 얼굴과 이름들,

그리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 때문에 죽어간 한 의인을 기억해낼까

 

그래서 더 간곡하고 절실하게 노래는 절정을 향해 가지만

단 한 명의 아이도 빈 교실로 돌아오지 못한 채,

짐짓 게릴라를 자처하는 가수의 노랫소리만

찬 공기를 가르며 침묵의 광장으로 느리게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객창을 도끼로 깨며 올 것 같은

막연한 예감에 한시라도 잠들지 못한 불면의 바다,

어디선가 잘려 나온 절규들이 맹골수도를 빠져나와

아파트 창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누른다

 

꿈에도 다 해진 운동화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던 아이,

모포를 둘러쓴 채 노을 진 바다를 바라보던 엄마를 불러낸다

 

그새 병들고 지친 세월이 한 애교둥이를 못 본 척 눈 감고 있는 저녁,

 

국가는 여전히 가만있으라, 선무방송하고

그만 백발이 성성해진 미치광이 같던 분노와

모욕들이 뼈만 앙상한 무릎에 제 머리를 파묻은 채

어디론가 떠도는 유령선의 시간들 곁에 쭈그려 앉아 있다

 

 


 

임동확 시인

1959년 전남 광산에서 출생. 전남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서강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취득. 1987년 시집 『매장시편』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살아 있는 날들의 비망록』 『매장시편』 『운주사 가는 길』 『벽을 문으로』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 등이 있음. 현재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