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확 시인 / 입춘 무렵
그악스럽게 도토리, 상수리를 주워가던 지난겨울에도 살아남은 청설모 새끼 두 마리가 스트로브 잣나무 가지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해발 73M 궁산 공원
삭정이로 얼기설기 아카시아나무 우듬지에 엮어놓은 까치집이 마치 시대를 훌쩍 앞서간 예언자처럼 뜻하지 않은 초속 21M 강풍에도 끄떡없이 잘 버텨내고,
저마다 혹독한 생존의 비밀을 풀려는 듯 도끼이자 숟갈인 부리를 가진 딱따구리는 선 채로 썩어간 지 오래인 밤나무 둥지를 연신 쪼아대고 있다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짚은 채 정상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할머니가 오르막에서 잠시 눈길을 돌리며 쉬는 동안
제주 삼다수 2L병에 담아 연민하듯 뿌려주는 흰 쌀을 거부하듯 멧비둘기 한 마리 노오란 개나리 울타리 그늘 아래 부엽토를 연신 두 발로 파헤치고 있다
혼자인 게 두려워 이리저리 떼 몰려다니는 겁 많은 참새들이 사철나무 조팝나무 덤불로 옮겨간 사이
앞서 드러나야 할 미래 같은 모습을 한 새매 한 마리 늘 소란한 연둣빛 현재의 지상을 굽어보며 제 먹잇감을 찾고 있다
임동확 시인 /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네가 깊고 푸른 심연의 난간에 그나마 성한 영혼의 한 발을 걸친 채 그믐달처럼 매달려 있을 때 내가 사랑한 건 결국 너의 전부가 아닌, 행여 저조차 끝없이 못 믿어온 한낱 난파선 같은 나의 의지 기껏해야 벌써 싸늘해진 기억의 선체를 인양(引揚)하는 일만이 오롯이 너의 몫으로 남아 있을 때 내가 가진 것이라곤 널 최후의 순간까지 지탱해줬을 법한 수평선마저 탕진해버린 시간의 잔해들 그만 네가 신촌 사거리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연신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통곡하고 있었을 때 내가 확신하는 것이라곤 반향 없는 메아리처럼 사라진 너의 뒷등을 오롯이 기억하며 겨우 여기 살아 노래하며 기도하고 있을 뿐 정작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간절하게 부르며 거대한 수압 같은 고독과 마주하고 있었을 때
임동확 시인 / 이중섭展
1.
필시 원치 않았을 가난보다 더 지독했을 너의 그리움, 꺾일 줄 모르는 너의 의지가, 아니 그럴수록 예리한 너의 고독이 흰 소처럼 씩씩대며 뒷발을 차고 있다 저를 삼킬 듯 큰 물고기 아가리, 집게발을 가위처럼 벌린 게를 보며 마냥 깔깔대는 벌거숭이 아이들이 환한 배꼽을 드러낸 채 나뒹굴고 있다
2.
기교마저 생략한 최소한의 면적과 상상을 가둔 최소한의 구도만이 간신히 허락된 너의 적빈(赤貧)이, 그래서 필시 비대칭의 화면이었을 너의 극빈(極貧)이 식솔들을 이끌고 결코 이별 없는 태초의 땅 더 이싱 전쟁도, 가난도 없는 무채색의 하늘을 향해 먼 길을 재촉하고 있다
3.
굶주려 쭈그러든 위장처럼 맑아서 아무런 색채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은박지, 그래서 깊게 긁힌 세월의 흔적만 덩그러니 선명한 너의 은지화(銀紙畵), 그래서 궁극엔 무두질 된 너의 천진만 본질처럼 남은 영양 결핍의 필선들이 어느새 끈처럼 늘어난 두 팔을 뻗어 한껏 자유로운 공중제비를 돌고 있다
임동확 시인 / 솔베이지의 노래
누군가를 잊지 못할 때 과연 우린 무얼 하는 것일까?
뭐라고 말할라치면 그만 사라질까 단지 기억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그래서 더욱 숨 쉬기조차 버겁고 미안한 저녁 광장 생일날이 장례식이 된 작가 없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채 오지 않는 미래엔 제빵사, 배우, 선생, 간호사, 동물학자, 치과의사, 격투기선수와 같은 직업을 꿈꾸었던 차마 부르지 못한 얼굴과 이름들, 그리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 때문에 죽어간 한 의인을 기억해낼까
그래서 더 간곡하고 절실하게 노래는 절정을 향해 가지만 단 한 명의 아이도 빈 교실로 돌아오지 못한 채, 짐짓 게릴라를 자처하는 가수의 노랫소리만 찬 공기를 가르며 침묵의 광장으로 느리게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객창을 도끼로 깨며 올 것 같은 막연한 예감에 한시라도 잠들지 못한 불면의 바다, 어디선가 잘려 나온 절규들이 맹골수도를 빠져나와 아파트 창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누른다
꿈에도 다 해진 운동화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던 아이, 모포를 둘러쓴 채 노을 진 바다를 바라보던 엄마를 불러낸다
그새 병들고 지친 세월이 한 애교둥이를 못 본 척 눈 감고 있는 저녁,
국가는 여전히 가만있으라, 선무방송하고 그만 백발이 성성해진 미치광이 같던 분노와 모욕들이 뼈만 앙상한 무릎에 제 머리를 파묻은 채 어디론가 떠도는 유령선의 시간들 곁에 쭈그려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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