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연 시인 / 비대한 슬픔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면 차디찬 심장의 보고픈 이 보이지 않아 흐트러진 목소리 모을 수 있다면 허공에 떠도는 환영, 만질 수 있다면
슬픔은 점점 뚱뚱해지는데 담담하게 지내라는 공기들의 후덥지근한 말들
간절한 게 죄라면 하늘에 심장을 내 걸고 실컷 울겠어
나 대신 울어주던 비는 간간이 끊어지고 추적거리던 잔비 사이로 그림자를 끌고 온 햇빛의 발목 어디로 갔을까
과녁을 뚫던 화살은 꺾이고 허공에 빈 족적만 어지럽게 찍힌 길 잃은 기억
염소자리 하나 늘어난 북쪽 하늘을 보며 말없는 말이 벼랑을 기어오를 때 부재라는 단어에 고립된 나, 후회의 부표는 표류를 반복하고 눈물이 떨어지면 멀리 못 간다는 누군가 전언에 마지막 인사 옷깃으로 찍어 내네
― 현상연 시집 {가마우지 달빛을 낚다}에서
현상연 시인 / 가마우지 달빛을 낚다
계림 이강, 뱃머리에 가마우지 몇 마리 허기진 식욕 움켜쥔 채 사공의 신호로 강물에 뛰어든다
잡힌물고기 가마우지 목에 걸린다
甲이 비정규직이란 올가미로 그의 목을 조인다 삼켜지지 않는 물고기가 파닥거리고 밤새 자맥질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 가마우지 굶주린 눈빛이 날짐승의 본능으로 거칠게 빛나지만 또 다시 乙이 되어 값없는 달빛만 낚는다
현상연 시인 / 우울한지갑
전생에초원을 달리던 시절이 가죽으로 복제되었지 짐승의 본성 숨길 수 없어 비가 오면 비릿한 냄새에끌려 빌딩 숲이나 거리를 방황했지 그런 날은 부활이라도 한 듯 야생의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지 영역 표시가 된 곳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지린내 같은 가죽 냄새가 번져왔지 고삐도 없이 명품이란 허영에 매였지만 뼛속까지 숨겨진 혈통 어쩔 수 없는지 어떤 날은 인파 속으로 사라진 가방 혹은 구두를 보고 야생의 무리인 듯 쫓아가지만 눅눅한 동족의 풀밭 찾을 수 없어 몇 날 며칠을 다시 방황했지 방황이란 모든 기억을 실종시키는 것인지 사람들은 종종 취중에 나를 잃어버렸지 그럴 때면 공원 벤치나 유원지에 앉아 두둑해진 뱃속이 꼭 외상장부 같다는 생각을 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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