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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성식 시인 / 길 위의 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31.

홍성식 시인 / 길 위의 방

 

 

소진한 기력으론 신(神)을 만나지 못한다

황무지에 달이 뜨면

갸르릉 도둑고양이 울고

집 나간 누이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은 밥상에 마주 앉은 데드마스크들

시간은 석고처럼 창백하게 굳고

조롱의 숟가락질, 싸늘한 만찬이 끝나면

표정 없이 젖은 침대에 드는 사람들

 

어쨌거나 창 너머 달은 또 뜨는데

째각대는 시계 소리에 맞춰 계단을 올라

어둡고 축축한 방, 문을 열면

나신의 엄마

그녀로부터 시작하는 하얀 비포장길

꿈에서도 달맞이꽃은 흐드러졌는데

길을 잃은 자, 길 위에는 방이 없다

 

 


 

 

홍성식 시인 / 노량진 사는 행복한 사내

 

 

강에서 바닷고기의 비린내가 온다

 

어둠 깔리는 수산시장이

생선의 배를 갈라 새끼의 배를 불리는

사내들 악다구니로 끓는다

 

보기에도 현란한 사시미칼 서슬 아래

펄떡이는 생명 내장 쏟으며 쓰러지지만

서른아홉 대머리 박씨에게 죄가 없고

죄 없으니 은나라 주왕도 안 무섭다

 

허풍과 농지거리 섞어

서푼짜리 생 헐값 떨이에 거래하는

고무장화의 거친 사내들

파르르 떨어대는 넙치 아가미에선

'과르니에리 델 제수' 소리가 난다

 

그래, 오늘만 같다면

이번 달 딸아이 레슨비는 걱정 턴다

새까만 박씨 낯짝

전갱이 굵은 비늘이 빛난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홍성식 시인

1971년 부산에서 출생. 2005년 문예지 《시경》을 통해 등단. 시집 『아버지꽃』과 아시아-유럽 여행기 『처음 흔들렸다』 등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