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욱 시인 / 물속에 꽂아둔 책
그는 물속에서 책 한 권을 건져내었다
물빛에 바랜 에필로그와 물빛에 녹아든 마지막 구절을 찾고 있다
제목과 지은이 모두 지워진 책은 바닥의 평온을 읽기 시작했는지 오랫동안 물속에 고립되었다
의미가 다 빠져나간 줄거리 흐르고 흐르면 다음의 봄이 오고 말 텐데
텅 빈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무릎이 허물어지도록 흐릿해진 밑줄에 몰두하는
뻑뻑한 밤
건져 올린 책 모서리에서 여백마저 흩어지면 더는 기억하지 못할 눈망울로 책 속 주인공이 그를 바라보았다
- 『여름 달력에 종종 눈이 내렸다』(달아실, 2019)
장정욱 시인 / 종이 인형
가끔 입체감 없는 어린 시절이 튀어나오면 도화지 위에 당신을 그려 넣어요. 조심스럽게 목이며 몸통을 오려내지요. 납작한 엄마가 태어났어요. 아주 작은 당신,
낯선 방에서 잠을 자요. 칠 벗겨진 뒤주 위 엄마 냄새가 나요. 딱딱하면서도 높은 그곳에서 새우잠을 구부리면 종이 인형이 자장가를 불러줘요. 크레파스로 색칠한 옷을 걸치고 나를 안아요. 심장에 묻어나는 그 붉은 소리,
아침이면 종이 인형이 월남치마를 입어요. 뒤주 속 바닥을 긁어 밥을 짓지요. 흰밥에 피어오르는 안개 같은 김, 얼른 커서 나도 엄마가 되고 싶어요.
하도 매만져 엄마의 살갖은 다 해졌어요. 그치만 두눈은 한 번도 감긴 적 없죠. 밤낮으로 피곤한 목과 팔다리, 하얀 밥풀로 너덜너덜해진 엄마를 붙여요.
장정욱 시인 / 너무 깊어진 식탁
오랫동안 식탁보를 갈지 않았다 여름 내내 흘러온 소문이 그대로 가라앉았다
팔꿈치를 올려놓으면 한 계절이 밀려가 꽃들은 조금 더 색이 바랬다
희미할수록 익숙해지는 수면 햇볕이 쌓이고 그 위로 빗소리가 떨어지고
쓸쓸한 파문을 숟가락으로 퍼낼 때 물때 낀 불빛이 여러 겹으로 흔들리며 눈 밑이 어두워졌다
화병 속 짓무른 줄기를 잘라내는 건 물결의 끝자락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것
꼬리만 남은 생선이 지느러미를 비틀 때 물 한 자락, 식탁보 귀퉁이를 적셨다
오래전 떨어뜨린 젓가락 한쪽이 자정의 방향으로 굴절되었다
어제 차려놓은 한 끼의 식탁이 식어가도록 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미산 시인 / 부푼 말이 달콤해 외 1편 (0) | 2022.08.01 |
---|---|
홍성식 시인 / 길 위의 방 외 1편 (0) | 2022.07.31 |
현상연 시인 / 비대한 슬픔 외 2편 (0) | 2022.07.31 |
임동확 시인 / 입춘 무렵 외 3편 (0) | 2022.07.31 |
김명림 시인 / 횡재 외 5편 (0) | 2022.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