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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병승 시인 / 주치의 h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5.

황병승 시인 / 주치의 h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 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 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인형 같은 모습의 첫 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 (도끼질 할 때도) 그 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무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 애의 모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 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 였겠지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 떴다,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 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 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 다른 이야기는 없다. 스물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 가는 나의 의사 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

 

 


 

 

황병승 시인 / 첨에 관한 아홉소(ihopeso) 씨의 에세이

 

 

첨,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눈빛의 새끼 해마들처럼 민생을 살아갈 수는 없겠지

 

위험하지 않고 어떤 장애물도 함정도 없다는 그런 믿음. 그 어떤 책도 그 어떤 필름도 첨, 너의 마음을 오래 붙잡아 두지는 못하더구나

만일 네가 그런 훌륭한 책과 필름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네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증거

 

건너편 옥상에는 언제부턴가. 미래를 예언한다는 점술집이 들어섰고 왠지 모르게 나는 밤마다 숨이 찼다

그러던 어느 날, 점술집의 저 늙은 여편네도 하루 종일 미래를 들여다보느라 나만큼이나 숨이 찰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없으면 첨. 너도 없다. 그런 생각이 따라 왔어

 

첨, 내 동생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는 너의 사촌형, 아홉 소

 

첨 때문에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처음 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포엣 (poet. 온리 (only) 누벨바그 (nouvelle vague),

그것은 어딘가로부터 몰려와 낡은 것을 휩쓸고 어딘가로 다시 몰려가는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은 정지이고 정지의 침묵 속에서 비극을 바라보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서서히 바뀌는 것이다

 

고다르, 그즈음의 독서,

욕조에 누워 책을 읽고 있으면 온 가족이 들락거렸다

엄마 아빠 형 누나 동생 이모부 고모부 땟국물이 흐르는 내 목욕탕 내 공중목욕탕

거리의 경찰관 외판사원 관료들 시인 화가 미치기 일보 직전의 연인들 어린이 가정 주부 영화광 살인자 공원의 노인, 할것없이 모두 다 들락거렸고 뒤죽박죽 얽히고설키는 비극 속에서 물이 끊기고 하수구가 막혔다 내 목욕탕 내 공중목욕탕의 사라진 목욕 문화 더러워 더러워서 더러운 채로 지냈다

 

그리고 근질거리는 여름이 왔다

 

창작, 긁어대기 시작한다

창작, 긁어대기 시작한다

희미한 불빛 아래, 욕조에 널브러진 남자 책장을 넘기려다 그만 멈춰버린 손가락 풀어헤쳐진 머리칼, 그날 밤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커다란 욕조를 차지하고 드러눕자 웅성거리는 나체의 사람들, 악취 속에서 누군가는 떠밀고 누군가는 고함치고 누군가는 부둥켜안은 채로 카메라가 돌았다. 첫 씬 (scene)인지 마지막 씬인지 운문인지 산문인지, 네 멋대로 해라. 고다르가 오케이 컷, 이라고 읊조렸고 순간 의 침묵 속에서 ......... 그리고 조명이 꺼졌다

 

필름, 온리 누벨바그

 

조명은 꺼졌고,

침묵하겠다면 침묵하는 것이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몸속의 세균이 고름으로 흘러내리는 시간들처럼 서서히 그리고 나는 완전히 그 어떤 것을 이해했다

첨, 그러자 그것에 대해 나는 더 이상의 의혹을 품지 않게 되었고 그것을 생각해도 더 이상 그게 서지 않았다, 그것은 겨우 그런 것이다

 

서지 않는다면 서지 않는 것

첨, 비극을 그렇게 이해하자

 

나는 그러길 바래

 

쥬뗌므, 라는 발음을 알지? 그 말의 의미가 아니라 그 말의 발음이 끌고 다니는, 쥬와 템 과 므가 인사시켜 준 빛 혹은 선線들

 

그 슬픔으로 가득한...

 

첨, 나는 너의 사람이 되고 싶어 진심으로, 그럴 수 없겠지만 우리를 숨 찬 미래 네가 네 자신을 어리석고 별 볼일 없고 천박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 집 창문을 부수고 달아났지 너를 쫓아가 네 주먹의 피를 씻겨 주었을 때, 나는 네가 '형' 혹은 '아저씨'라고 불러주기 보단 머뭇거리는 두 팔을 뻗어 포옹을 청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진심으로 우리를 숨찬 미래 그럴 수 없어서 너는 그냥 '병신, 난쟁이 주제에' 하고는 부리나케 달아났지

 

첨. 내 사람의 이름

나는 그러길 바래

 

늙은 수사자가 젊은 암사자를 바라보듯이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빛 혹은 선들 속에서

 

온리 누벨바그

온리 누벨바그

 

 


 

 

황병승 시인 / 모든 진흙과 윤활유가 진실을 끌어당기는 군*

 

 

젖꼭지를 빨아주면 엄마 생각이 나지

 

기린의 목과 머리를 가진 나비가 있다면 날지도 못하고 열매를 따먹을 수도 없어서 슬프겠다

 

지난밤에 누가 죽었지? 아무도

지난밤에 누가 살아남았다고? 아무도

 

창가에서 커다란 닭대가리가 노려보고 있으면 마당에서 노는 일이 싫어지겠지

 

나쁜 게 ....... 처음부터 나빴던 게 .......... 입을 열지 않으면 아무도 놀라지 않을 텐데

 

비행기를 타면 달라질까

뉴욕에 가면 피스톨을 보면 달라질까 밤이 달라졌을까

고름을 재즈를 충동을 사랑하게 됐을까

 

늑대 품의 오소리는 웃으면서 태어나 웃으면서 죽었지

 

바보 같아 바보 같아 소리치며 빗질을 계속한다면 머리에서 피가 날지도 몰라

 

햇빛 때문에 구름이 타면 우리는 재를 맞겠지

 

좁은 방에서 밀떡을 먹는 바보, 피렌체 서커스 보르도 난쟁이 브리태니커 매독 그리니치 코카인 이비자 원숭이 에게해 피눈물...... 이 모든

 

가난한 친척을 양자로 둔 늙은이처럼

 

당신의 두 귀는 당신이 속삭이는 소리를 좋아해?

당신의 두 눈은 당신이 바라보는 것들을 좋아해?

당신이 떠먹여주는 음식을 당신의 목구멍은 좋아하지

 

축제가 열리던 69년 우리는 초라한 늙은 남자의 불알 속에서 모도 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

마츠모토 토시오가 장미의 행렬을 찍을 때는 어땠어? 어느 불쌍한 여자의 뱃속에서 운명을 탓하고 있었지

 

나쁜 게 ...... 처음부터 나빴던 게 ...... 입을 열지 않으면 마부도 놀라지 않을 텐데

 

코딱지만한 개미들이 자기 몸의 수십 배가 되는 거대한 개미 동상을 옮기고 있다고 상상해 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개미들을 위해 동상을 북쪽 굴의 광장으로!

 

당신은 여유가 있네........지나간 날들을 아름답게 볼 수 있을 만큼 늙어버린 거야? 혹시 죽은 사람이야?

 

당신은 아름다웠던 적이 없어

 

광장의 동상을 바라보며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 운명의 사람들도 있겠지

 

집 나간 애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나 변두리 극장에 쪼그리고 앉아 잔혹한 장면을 보고 또 보며 가족과 화해와 애정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일까

빈집에 모여 환각제를 나눠 먹으며 자신으로부터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나비의 몸과 날개를 가진 기린이 있다면 걷지도 못하고 꿀을 빨 수도 없어서 슬프겠다

 

창가에서 커다란 닭벼슬이 흔들리고 있으면 집에 가는 일이 싫어지겠지

 

환각에서 깨어 바라보던 저녁하늘은 상처고 코피고 뜨 불통이었는데

 

바보 같아 바보 같아 거울을 들여다보며 빗질을 계속한다면 다른 애가 올지도 몰라

 

이곳에 있으면서 언제나 이곳에 없는 사람처럼

이곳을 그리워하며 이곳을 기억 밖으로 내쫓으려는 사람처럼

 

책 읽는 수업이 있고 문장을 적는 수업이 있어

 

안경을 쓰면 안경알이 보이지

 

* 코미즈 카즈오의 영화처녀의 창자> 중에서

 

 


 

황병승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2003년 《파라21》에 〈주치의 H〉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등이 있음. 201년 제11회 박인환문학상과 2013년 제13회 미당문학상 수상. 2019년 요절함.(1970. 4. 4 ~ 2019.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