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종환 시인 / 어떤 권태 -잠시 쉬어가는 시 혹은 좆에 거는 기대
벌건 대낮, 이웃집 옥상 빨랫줄에 널려 있는 분홍색 팬티 한 장.
그 부재의 알몸을 시위라도 하듯 바람에 나불나불..... 어느 열이 많은 속살의 연장인 듯.
그 분홍빛 현기증에, 공기가 들어가는 고무 튜브처럼 슬그머니 팽창하는 아랫도리.
겨우 그 팬티 한 장을 보고 한 묘령의 여인의 추문을 캐내려 애쓰며 삼류 소설 한 편 써낼 수 있는 상상을 펼치는 이.
그것도 모자라, 그 팬티가 불결해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조목조목 상상하는 이.
이웃집, 시 쓴다는 총각.
인격 훼손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외설의 문학적 전통을 아직까지 고수하는 이. 그 총각 왈,
시는 인격도 품격도 아닙니다 시는 항상 시를 부인하는 모든 대상을 향해 결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웃집 옥상에 널려 있는 젖은 팬티처럼, 이 소용 없는 푸르른 청춘을, 개집 처마에 개털처럼 대롱대롱 걸려 있는 이 대낮을, 시인의 영혼에 시가 들어차자마자 임신중절 시키는 이놈의 세상을, 조용히 야유하는 것입니다 단지, 삼천원짜리 여자 팬티 한 장이 내 불임의 사상 속에 선명한 월경 자국을 남겨줍니다
그렇습니다, 내 좆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도 없이 오래오래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지지리도 음란하게 생겨먹은 이놈은, 그 생김새에 비해서는 그리도 성스러운 형이상학적 용도까지 지닌 몸이십니다 내 지성의 영원한 라이벌 격인 이 녀석을, 저는 그래서 거세하지 못하고 동업을 궁구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지성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말릴 수 없는 이놈의 영원한 대물림의 눈물을, 아아, 저는 아직 사랑하는 이에게 우발적으로 권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모두들 그 사용법도 모르면서 과용하고 있는 미 神의 뜯겨진 선물을, 한번 뜯겨진 이상 다시금 밀봉되지 않는 이 꿀단지를, 아아, 저는 아직 사랑하는 이에게 감출 줄도 모릅니다그려.....
벌건 대낮, 이웃집 옥상 빨랫줄에 널려 있는 저 분홍색 팬티 한 장
애인들은, 저 속옷을 잠시 흔들다 지나가는 바람입니다
-시집, 어느 도시 거주자의 몰락, 문학동네
주종환 시인 / 초승달 아래 영하 4도
김 오르는 국밥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TV를 곁눈질 하던 중년의 남자들이 있었다
김 오르는 국밥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긴 하룻밤을 애타게 구하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스치는 눈발, 도심의 가파른 골목길들, 겨울은 길고 고기 집을 들르지 않고 찾을 수 있는 애인은 없었다
주종환 시인 / 자정의 막다른 골목
어서 오세요. 그리고 미세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 자정이 넘어서도 잠이 오지 않는 당신
셔터가 내려진 거리엔 집 나온 처녀 같은 행색 하나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맨땅에 앉아있고
어서 오세요. 그리고 미세요
이곳은 당신에게 마무것도 팔 것이 없는 실내올시다 무엇을 사시려고요?
앉아도 됩니까? 살 것이 있어서 왔는데 당신은 팔 것이 없다
난 이미 세상이 아닌 물속에 젖은 책 속으로 들어왔고, 그대는 책 밖에서 책을 구매하지 않소
백치와 책벌레가 한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는 격이오 우린 서로의 흠집을 냄으로써, 생존 가능한 거울인가?
여러 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 남자의 품이 그리운 어린 처녀와 술값만 있으면 겨울을 나는 어느 시인은 영영 서로에게 무관심하다는 걸 알았소
어린 처녀가 꿈꾸는 것은 사랑의 보금자리, 시인이 꿈꾸는 건 원치 않는 장소에서 객사하지 않는 거요
당신은 아직 술과 고기 탄 냄새가 밴 헌책을 버리지 못한 거요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얻은 새 책들을 부러진 상다리 대신에 깔고 있소
유성우가 지나던 밤에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소? 이 세상 그 누구도 당신을 찾지 않는 세월 속에 그대가 발견한 새 책의 첫 페이지가 있었소 자신이 서명할 수가 없는 자서전이었소
세상의 모든 유성은 바로 그러한 책 속으로 떨어지오 세상은 전대미문의 하룻밤을 남긴 허송세월이라오
재색(財色), 그리고 정(情) 만인의 심금을 울린 이야기 어서 오세요. 그리고 미세요 우리가 파는 것이 바로 그거랍니다
-시집, 계곡의 발견, 지혜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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