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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종환 시인 / 어떤 권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6.

주종환 시인 / 어떤 권태

-잠시 쉬어가는 시 혹은 좆에 거는 기대

 

 

벌건 대낮,

이웃집 옥상 빨랫줄에 널려 있는

분홍색 팬티 한 장.

 

그 부재의 알몸을 시위라도 하듯

바람에 나불나불.....

어느 열이 많은 속살의 연장인 듯.

 

그 분홍빛 현기증에,

공기가 들어가는 고무 튜브처럼

슬그머니 팽창하는 아랫도리.

 

겨우 그 팬티 한 장을 보고

한 묘령의 여인의 추문을 캐내려 애쓰며

삼류 소설 한 편 써낼 수 있는 상상을 펼치는 이.

 

그것도 모자라,

그 팬티가 불결해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조목조목 상상하는 이.

 

이웃집, 시 쓴다는 총각.

 

인격 훼손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외설의 문학적 전통을 아직까지 고수하는 이.

그 총각 왈,

 

시는 인격도 품격도 아닙니다

시는 항상 시를 부인하는 모든 대상을 향해

결례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웃집 옥상에 널려 있는 젖은 팬티처럼,

이 소용 없는 푸르른 청춘을,

개집 처마에 개털처럼 대롱대롱 걸려 있는 이 대낮을,

시인의 영혼에 시가 들어차자마자

임신중절 시키는 이놈의 세상을,

조용히 야유하는 것입니다

단지, 삼천원짜리 여자 팬티 한 장이

내 불임의 사상 속에 선명한 월경 자국을 남겨줍니다

 

그렇습니다,

내 좆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도 없이

오래오래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지지리도 음란하게 생겨먹은 이놈은,

그 생김새에 비해서는 그리도 성스러운

형이상학적 용도까지 지닌 몸이십니다

내 지성의 영원한 라이벌 격인 이 녀석을,

저는 그래서 거세하지 못하고

동업을 궁구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지성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말릴 수 없는

이놈의 영원한 대물림의 눈물을,

아아, 저는 아직 사랑하는 이에게

우발적으로 권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모두들 그 사용법도 모르면서 과용하고 있는

미 神의 뜯겨진 선물을,

한번 뜯겨진 이상 다시금 밀봉되지 않는 이 꿀단지를,

아아, 저는 아직 사랑하는 이에게

감출 줄도 모릅니다그려.....

 

벌건 대낮,

이웃집 옥상 빨랫줄에 널려 있는

저 분홍색 팬티 한 장

 

애인들은, 저 속옷을 잠시 흔들다 지나가는 바람입니다

 

-시집, 어느 도시 거주자의 몰락, 문학동네

 

 


 

 

주종환 시인 / 초승달 아래 영하 4도

 

 

김 오르는 국밥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TV를 곁눈질 하던 중년의 남자들이 있었다

 

김 오르는 국밥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긴 하룻밤을

애타게 구하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스치는 눈발,

도심의 가파른 골목길들, 겨울은 길고

고기 집을 들르지 않고 찾을 수 있는 애인은 없었다

 

 


 

 

주종환 시인 / 자정의 막다른 골목

 

 

어서 오세요. 그리고

미세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 자정이 넘어서도

잠이 오지 않는 당신

 

셔터가 내려진 거리엔

집 나온 처녀 같은 행색 하나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맨땅에 앉아있고

 

어서 오세요. 그리고 미세요

 

이곳은 당신에게 마무것도 팔 것이 없는

실내올시다

무엇을 사시려고요?

 

앉아도 됩니까?

살 것이 있어서 왔는데

당신은 팔 것이 없다

 

난 이미 세상이 아닌 물속에 젖은 책 속으로 들어왔고,

그대는 책 밖에서 책을 구매하지 않소

 

백치와 책벌레가 한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는 격이오

우린 서로의 흠집을 냄으로써, 생존 가능한 거울인가?

 

여러 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

남자의 품이 그리운 어린 처녀와

술값만 있으면 겨울을 나는 어느 시인은

영영 서로에게 무관심하다는 걸 알았소

 

어린 처녀가 꿈꾸는 것은 사랑의 보금자리,

시인이 꿈꾸는 건 원치 않는 장소에서

객사하지 않는 거요

 

당신은 아직 술과 고기 탄 냄새가 밴 헌책을 버리지 못한 거요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얻은 새 책들을

부러진 상다리 대신에 깔고 있소

 

유성우가 지나던 밤에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소?

이 세상 그 누구도 당신을 찾지 않는 세월 속에

그대가 발견한 새 책의 첫 페이지가 있었소

자신이 서명할 수가 없는 자서전이었소

 

세상의 모든 유성은 바로 그러한 책 속으로 떨어지오

세상은 전대미문의 하룻밤을 남긴 허송세월이라오

 

재색(財色), 그리고 정(情)

만인의 심금을 울린 이야기

어서 오세요. 그리고 미세요

우리가 파는 것이 바로 그거랍니다

 

-시집, 계곡의 발견, 지혜출판사

 

 


 

주종환 시인

1969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 1992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느 도시 거주자의 몰락』(문학동네, 1997), 『일개의 인간』(천년의시작, 2002), 『신비주의자』(천년의시작, 2003), 『끝이 없는 길』(서정시학, 2007), 『계곡의 발견』(지혜사랑, 2013)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