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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정연 시인 / 아름다운 이야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6.

한정연 시인 /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각했다 초콜릿 중독자가 있다 강렬한 풍미를 느끼는 혀끝은 행복에 전율한 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장한 초콜릿은 얼마든지 쌓여서 영원한 시간을 뚝 뚝 녹아 흐를 것 같다

 

주인공은 초콜릿을 먹다 죽는다 갑자기 죽는다고? 초콜릿에 혀를 대는 순간이었는지 기필코 목구 멍 너머로 넘긴 후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반드시 죽는다 왜냐고 묻는다면 하품이 나올 수 있다. 이유가 없어서 삶은 끔찍한 거니까 모른 척 잔인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시작과 동시에 죽은 자의 꿈을 들여다본다

 

눈이 먼 맨발의 사람이 긴 옷자락을 끌며 눈밭을 걷고 있다 넝쿨줄기 채찍으로 자신의 몸뚱이를 내려치며 걸음 하나에 채찍 한 번, 세상은 후회로 눈부시다 그는 버려졌다 그가 그를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건 오이디푸스 비극 같잖아? 단순하게 시작했는데 시대극이 돼버렸네 비참한 인간의 운명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이건 케케묵은 초콜릿에 대한 취향이랄까 시공을 초월하고 형태를 바꿔도 달라 지지 않는 이건 초콜릿 껍질을 벗기고야 마는 이야기다

 

어떤 감정의 원천은 독성을 갖는다 극도의 긴장과 정신적 고갈을 동반하는 그것, 그것을 학대하며 죽음을 걷는다고 하자 구원은 없다 나를 거두어달라고 외쳐도 불순종의 윤리를 실천하는 안티고네는 등장하지 않는, 그것이 좋다 어차피 찰나의 달콤함이었으므로 격렬한 혀끝의 일이었으므로 각자의 입장이란 게 있으니까 시시한 논평을 달고 누가 누구의 인생을 판단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므로 마무리는 모호하게 그대로 아름다운, 그것이 좋다

 

어떻게든 이야기는 시작되어서 당신은 울음을 멈출 수 있다

 

 


 

 

한정연 시인 / 끝없는 이야기

 

 

당나귀는 무거웠다 등에 진 소금 짐들은 늘어났다 땀을 뻘뻘 흘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마침내 개울에 잠겨 등허리를 짓누르던 고통의 자취가 사라질 때까지

 

이야기는 끝났는데 소금이 녹아 흘러내리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더운 자루는 헐거워지고 끈적한 업보일랑 훌훌 털어버리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어야 하는데

 

그 후에도 무거웠다 생각만 남아 당나귀처럼 무거웠다

 

 


 

한정연 시인

충남 천안 출생.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졸업. 2017년《현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