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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극래 시인 / 잘 자요 오렌지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6.

조극래 시인 / 잘 자요 오렌지

 

 

영혼을 반환하러 왔다는 그녀는 무성한 열대야를 안고 있었다

 

바다에서 파도를 끄집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한다는 것이 얼마나 목덜미가 뻐근해져 오는 일인지

 

보석을 두른 그녀의 객기는 가벼워 보였다

 

그림자까지 침범한 눅눅한 습기를 바라보며 나는 싱싱한 오렌지 하나를 건넸다

 

아직도 절망은 리마 해변에 심취되어 있을까요

 

다리를 푹푹 옭아매는 개펄에도 숨소리는 꿈틀거립니다

 

저쪽 백사장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흥건하게 엎질렀다 눈꺼풀이 축 처진 밤의 이마에 폭죽을 올려놓았다 놀란 새들이 숲을 불 지르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나는 농담에 맞아 죽은 스물네 마리 자고새를 그려보다가

어쩌면 새들은 페루로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새들은 날아야만 길을 볼 수 있고 언제든지 선회할 수 있다

 

유행가를 탕진한 백사장이 기진맥진한 표정을 지을 때 그녀는 책 꺼풀 속에 쟁여 둔 깊은 잠을 꺼내러 갔고

 

귀퉁이 아래가 접혀졌다

 

나는 이름을 묻지 않았던 걸 기억하고

한참 동안 달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3월호 발표

 

 


 

조극래 (趙克來) 시인

1963년 통영에서 출생. 경상대학교 영문과 중퇴,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과 졸업. 1999년 《문예사조》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답신』(문학과의식 2002)과 창작집 『초보시인을 위한 현대시 창작 이론과 실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