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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혜정 시인 / 밤의 스탠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6.

허혜정 시인 / 밤의 스탠드

 

 

이 아름다운 스탠드는 우리가 고른 것이다

작은 유리구슬을 당기기만 하면 부드러운 빛이 퍼진다

텅스텐 필라멘트처럼 위태롭게 깜빡이며

잠옷 위로 흐린 그늘을 만드는 빛

벽 위에 어슴프레 번져가는 그림자의 금

하나의 시공간에 엄연히 두 개의 삶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

하긴 어떻게 두 사람이 다 만족하는 사랑이 있는가

나날의 타협으로 쌓아올린 흐린 유리성

두 개의 상처를 이어 붙인 솔기처럼

하나의 행은 끝없이 이어진다

밤의 불빛 속으로 다가오는 피로한 얼굴

한 사람은 곯아떨어지고 한 사람은 깨어 있는 침대

이상한 슬픔이 몰려오고 갑자기 섬뜩하도록 차가운 정적

집이 텅 빌 때 느껴지는 그러한 정적

사랑. 누가 그 처음의 뜨거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서서히 식어가며 함께 누워 있는 욕조처럼 편안해지는 것

그리고 창백한 타일 위에 고여 있는 물방울처럼

싸늘하게 말라가는 외로움

사랑을 끝내기는 힘든 일이다

어쨌든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상한 그늘 아래 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생활 그렇게 사실적인 그렇게 정확한

마시고 먹고 대화하는 식탁의

그 침대의

그 불빛의

그 외로움의 그늘 아래

 

 


 

 

허혜정 시인 / 적들을 위한 서정시

 

 

다시 의문은 시작되었다

숙맥들은 눈치채지 못할 신호를 돌리다

슬며시 자리를 터는 그들은 어디로 몰려가는 걸까

뒤늦게 홀로 구두를 찾아 신고 내려오는 시간

확실히 내가 모르는 암호가 있는 것이다

 

악수도 모르고 멀어지던 거만한 그들

뭔가 안 보이는 벽 너머에서

내일이 있는 척 웃어대던 얼굴들

나에겐 너무도 힘들었던 문제들

흥나는 대로 지껄여대던 혀들

내심 옆 사람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알 수 없는 귓속말을 즐기는 그들

 

굳게 잠가놓은 안쪽에서 그들이

어떤 세상을 세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함부로 넘겨짚진 않지만,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건

벽 너머 세상, 어쩌면 그 호기심조차

다 똑같은 목적 때문이라 생각할지 모를

그래서 혹 내 꿈을 안다고 재단해왔을지 모를 그들

 

하지만 성공까지는 바래본 적이 없다

종이가 무엇이란 걸 알기 때문에

목적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다

닥치는 대로 쓰고 핸들을 돌리고 돌리다보면

어디선가 들어맞을지 모를 숫자를 찾아

한 칸씩 한 칸씩 정교하게 조합해 맞춰보는 퍼즐

반쯤 왔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방향을 틀었다

알았다고 생각할 때 바보같이 머리를 쳤다

알만한 농담으로 웃어넘겼던 말도 생각하며 걸었다

 

오늘 다시 틀렸다고 생각한 말들을 지운다

부패한 방언으로 가득한 대화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미치광이가 되어

차갑고 단단한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단어는 뭘까

꼭두각시 하나 불태울 수 없는 말이라면

시 같은 건 손대지도 않았다

 

 


 

허혜정 시인

1966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및 同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7년《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1995년 《현대시》 평론상에 당선,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도 당선되어 시인이며 평론가로 활동. 2010. 제11회 젊은 평론가상, 동국문학상 수상.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숭실사이버대학교 방송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