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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명보 시인 / 가마우지* 종족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6.

박명보 시인 / 가마우지* 종족

 

 

일생이 구강기인,

한 번도 무엇을 삼켜본 적 없는 커다란 아가리를 가진 종족,

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나요, 당신

 

본시 결핍이란

무언가를 끝까지 소유해보지 못한 상처의 음각이거나

공중에 뿌리 내리려는 맹목 같은 것이어서

 

힘주어 물고 있던 어금니가 시큰해질 무렵

알게 되죠, 느슨해지는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걸

모두가 떠난 밤에

위문편지처럼 줄 위에 걸리는 초승달

그녀의 꽃무늬 원피스는 끝내 가질 수 없었지만

 

가마우지 종족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지요, 당신

입안의 것 다 내주고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오늘 빨랫줄에는

빈 하늘만 펄럭이고 있네요

 

*가마우지: 중국의 계림지방에는 가마우지 낚싯법이 있는데 새의 긴 목 아랫부분을 끈으로 묶어, 잡은 물고기를 꺼내는 방법이다

**구강기: 프로이트의 성적 심리적 발달단계의 5단계(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 성욕기)중 첫 단계로 생후 12- 18개월에 이르기까지 성적 에너지가 주로 유아의 구강 부위에 집중되는 시기

 

 


 

 

박명보 시인 / 나혜석거리에서

 

 

나비전시회

입구부터

박제된 생이 즐비하다

 

데칼코마니 같은 양쪽 날개

그중, 양 날개의 무늬가 서로 다른 나비 한 마리 도드라진다

무늬가 다를수록 높은 값을 받는다

 

사람의 얼굴도 반반이 다르다는데

삶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조금씩 이중을 덧칠해 가는데

 

그리하여

가장 친근한 것들이

가장 믿었던 것들이

때로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편견 없는 지성이 한낱 풍문이었거나

같은 슬픔의 무늬를 지닌 이가

막다른 골목에서 등을 돌릴 때

 

홀로 길 밖으로 걸어나간 그녀

오늘 다시 모시나비의 투명함으로

나를 비추는지

무수히 사라졌다 돋아나길 반복하는,

내 반쪽 날개의 검은 반점이

침에 찔린 듯 따끔거린다

 

 


 

 

박명보 시인 / 문, 그 경계에서

 

 

나는 문이다

 

열리거나 닫히거나

지금은 기척이나 체온만으로

재빨리 몸을 열 수 있을 만큼 진화해왔지만

여전히, 나는 문이다

 

타인의 손길에 길들여진 타성으로

기다림은 나의 경전이었지만

짧은 일별을 던지며

사람들은 무심히 나를 지나쳐갔다

어제와 오늘

만남과 결별의 시간들을

바쁜 발자국소리에 구겨 넣고

아주 잠깐씩 고개 숙이며

 

묻어온 지문들을 닦으며

잊혀진 이유들을 생각하며

오랫동안 내가 내 안을 반복해서 돌고 있을 때

세상의 빛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봄에서 겨울로

겹겹이 쌓였다 사라지곤 했다

 

사라지는 것들은 길 위에 서 있는 것

 

흐릿하게, 토막 난 길을 향하여

나를 고정한 녹슨 못들이 삐걱거린다

붉은 시간들이 헐거워진다

 

 


 

 

박명보 시인 / 물병자리* 여자

 

 

밤마다 외출을 한다

높은 담장을 넘어

달빛에 뒤채는 검은 잎사귀들 사이를 날아올라

별에 그네를 매는 여자

풀꽃으로 날렸을 어느 전생의 별이거나

바람으로 떠돌았을 전전생의 별들을

징검다리삼아 건너뛰기도 하면서

마이너스 통장으로 대변되는 습곡들도

몸에 길들여진 허물일 뿐 이라고,

그런 밤에는 먼 후생에 가서 닿을

어리디 어린 푸른 별을 찾아보며 가끔씩 즐겁기도 했다

사수자리의 사내에게 어떻게 나를 지키는가를

전갈자리의 사내에게는

공격에 대한 새로운 전법을 익히기도 하면서

때로 양자리여자에게서 슬픔을 묵상하는 법을 배워오기도 했다

아침이면 창창하게 물 오른 전사가 되어

빌딩숲 사이를 누비기도 하지만

몇 억 광년 후, 혹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제비꽃 위에 발 디디듯 가만 가만

맨발로 지구별 위를 걸어보는 여자

 

*물병자리 - 점성술의 별자리에서 양력 1월20일에서 2월 18일에 태어난 사람. 직관적이며 사회일반의 선, 악을 넘어 본질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기질의 소유자로 현실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함.

 

 


 

박명보 시인

충북 영동에서 출생. 한신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교실 수료. 경기평생교육학습관 문예창작반 수료. 2010년 《시산맥》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