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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기찬 시인 / 화무십일홍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6.

김기찬 시인 / 화무십일홍

 

 

 햇볕과 매화만 가득한 채소밭에 누가 다녀갔네요. 허공에 노를 저어 나아간 흔적 또렷했어요. 그는 분명 무릉도원을 찾아 변산 바다를 막 건너왔을 것이지만, 구름을 타고 왔는지 바람을 타고 왔는지 통통배를 타고 왔는지는 묻지 않았어요. 수수하게 차려입은 그는 이생의 봄날이 처음인지라 약간의 지친 날개를 접었다 폈다 했을 겁니다. 그가 앉은 자리마다 꽃자리였으므로, 한없이 자유로운 그는 향기로운 꽃술에 입 맞추며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물씬 비린내 나는 풍문을 옮겼을 거예요. 진종일 자욱한 꽃향기에 젖어 꿈인지 생시인지 허둥지둥 헤집고 다니기에 바빴겠죠.

 

 그는 무릉도원을 관리하는 상근직원입니다. 이제 막 터트린 천진한 꽃들에만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내죠. 동그랗게 말린 빨대를 빳빳하게 세운 뒤 감탄사로 빨대를 꽂고 감탄사로 사랑을 빨죠. 그때마다 꽃봉오리가 진저리치며 활짝 피어났어요. 내 눈에 붙들린 그는 서 말의 향기와 닷 되 가량의 사랑을 꿀로 가져갔을 겁니다. 눈물 많은 목련은 분노하고 앙탈을 부려보지만 금방 순해져요. 명자는 가렵다고 말하고 라일락은 시원하다고 말했어요. 그들은 애인인 듯 불륜인 듯 봄의 널따란 공원에 모여앉아 키득키득 웃음을 흘려요. 행인들은 그들의 자발적인 표정을 보고 참 좋아했다지요.

 

 꽃들의 속내를 너무도 잘 아는 그를 더는 말릴 순 없었어요. 참다못한 나도 그를 따라 호객꾼이 되어 매일매일 팔랑거렸답니다. 내 안의 호기가 발동한 거죠. 이제 그만 잊어도 될 성싶은 스마트폰에 핀 꽃들에게 카톡을 날렸죠.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지난봄 따지 못한 사랑을 좀 따볼까? 하는 달달한 생각을 잠깐 폈다 접었는데요. 이젠 저만의 어지러운 세상을 살까 봐요. 생각해보면 내게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고 이 계절은 사랑할 게 너무 많아서 반성할 것도 많아요. 호들갑스러운 나의 봄날은 다른 계절에서 빌리거나 꾸어온 것들로 눈부셨죠. 어제는 만화방창 예배당에서 고요히 날개 손을 접고 당신을 빌어요.

 

 화무는 십일홍이었지만, 남발한 봄날 때문에 나는 한층 피가 맑아진 느낌이에요. 꽃을 거느린 그는 얼마나 흘러 다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알 순 없지만 풍만한 모란은 더 착해졌으며 작약은 환호작약했다지요. 수척한 몸으로 어질러 놓은 봄날을 책장 넘기듯 팔랑, 하고 여름으로 빠져나와 덩굴장미에게 편지를 쓰고 또 가을로 건너가 들국화를 만나기에 바쁘겠죠. 그 사내 날개 수첩에는 아직 주고받을 전화번호가 몽골몽골 피고 있으니까요. 참, 봄날의 미투(美鬪)는 투닥투닥 사방에서 피겠죠? 아, 저요. 저는 육체가 시들기 전 없는 애인을 만나거나 몽상가가 되어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한 십 년 거닐어볼까 합니다만.

 

웹진 『시인광장』 2022년 3월호 발표​

 

 


 

김기찬 시인

전북 부안에서 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바닷책』, 『피조개, 달을 물다』, 『채탄부 865-185』가 있음. 석정촛불시문학상, 전북시인상, 한국미래문화상을 수상. 현재 변산 유유마을에서 시창작 지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