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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장석 시인 / 난곡동에서 죽음의 방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5.

전장석 시인 / 난곡동에서 죽음의 방식

 

 

마치 오랫동안 준비했던 것처럼 죽음은

골방에서 사흘 만에야 꺼내졌다

이웃집 할머니의 말이 적중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들키고 말았다

잠든 척하며 119차에 실리기 전까지

죽음은 가장 평온한 잠에 떨어져 있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

틀니를 물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최초의 발설자가 얼굴을 쓰다듬자

식은 손이 침대 밖으로 튀어나왔다

의심할 여지 없는 자연사라며

구급대원들은 시신을 재빨리 수거하였다

가족들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목격자들이 유가족이 될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길 꼭대기 삶이었다니

이제 길을 내려가야 하지만

 

팽팽한 곳을 향해 그는 처음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딱 한 번만! 하고 눈 뜨려다

내려가는 길을 보고

안심한 눈을 다시 감았다

 

-시집/ 서울, 딜큐사/ 상상인

 

 


 

 

전장석 시인 / 눈 내리는 충무로 인쇄골목

 

 

첫눈이 왔을 뿐인데

쇄출기가 고양이 발걸음처럼 느릿느릿해지고

 

첫눈이 왔을 뿐인데

갑자기 허기가 져 순댓국에 소주를 시킨다

 

어쩌다 첫눈이 왔을 뿐인데

흐린 창밖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오래 서성이고

 

첫눈이 오자 인쇄골목 사람들은

그동안 망설이던 기차를 타고

고향의 설원을 향해 달리는 꿈을 꾼다

 

늙은 쇄출기가 밤새 콜록이던 골목골목에

아픈 상처를 더듬듯

눈은

낡은 입간판을 어루만지고 천막 위에

흰 천막을 덮는다

 

그곳에 맨 처음인 듯 쓰여진

눈의 마지막 문장에다 마침표를 찍으려

들뜬 사람들의 분명한 발자국이 지워지고 다시 찍히고 있다

 

어쩌다 첫눈이 왔을 뿐인데

늙은 암고양이

밤새 낡은 쇄출기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좌우 막힘없이 몸놀림 가볍던 지게차는

눈송이 하나에도 무거운지

혼곤하게 잠들어 있다

 

-시집 / 서울, 딜큐사/ 상상인

 

 


 

전장석 시인

2011년 《시에》로 등단. 시집으로『서울, 딜쿠샤』(상상인, 2021)이 있음. 2019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현재 한국경제신문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