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일 시인 /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의 접속을 기다리며 하는 상념
지금 만나러 가는 너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도 직업일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너는 묻지도 않았는데 만날 때마다 종종 대답한다. 시인은 가장 큰 직업이다. 마치 스스로 드는 미심쩍음에게 하는 대답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다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가장 큰 직업' 이라는 말이 좀 걸린다. 그 말은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 건 최근의 일이다. '가장 큰 직업' 이란 당최... 무엇일까, 식상하게 삶이나 죽음 같은 것만 아니면 나는 상관없다.
열심히 노동하여 집을 지으면 폭풍이 와도 튼튼한 집이 남지만, 열심히 밤새 지은 '시' 라는 채널의 관건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얼마나 큰 슬픔을 나누고 허무는가에 달렸다. 아침 해와 함께 흔적 없이 증발하는, 실체가 남지 않은 일을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가장 큰 직업은 직업은 아니라는 뜻이 분명하다.
무작위로 배정되는 한 편의 채널에 접속을 기다리며 들었던 상념들을 서로 나누며, 빨래 개기를 마친 너는 노동의 대가로 배달 음식을 시킨다. 휴대폰을 집어 들면서 함께 있는 공간을 둘러보며 한마디 덧붙인다.
이런 수십 개의 채널을 모아놓은 한 권의 시집은 말이야, 다림질까지 한 듯 기막히게 반듯이 개어놓은 시인의 속옷 같단 말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표백제로는 아무리 빨아도 결코 다 빠지지 않는 슬픔의 때가 미량이나마 껴 있어서, 결국 죽을 때까지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계속 다시 빨아야 하는, 빨다가 갑자기 눈물이 툭 터질 정도로 허무하기가 그 어떤 시적 수사로도 비유할 수 없는.
-월간 《현대시 2022년 2월호에서-
김중일 시인 / 지구를 끌어안다가 가슴이 꿰뚫린 하늘
공중이 우주로 날아가지 않도록 공중의 끝자락에 무수히 꽂아둔 나뭇가지들 공중과 가지 사이 실밥처럼 불거진 꽃들 공중에 나무들이 쏘아올린 공처럼 치솟는 새들 새들은 까마득한 공중에 난 검은 구멍이다 그 구멍으로 검고 깊은 우주가 들여다보인다. 새는 지구를 끌어안다가 가슴이 꿰뚫린 하늘의 구멍이다. 새의 깃털은 하나하나 깊은 주름이다. 새 한 마리가 여자의 정수리 위를 맴돈다. 한 여자가 공중에 난 구멍을 올려다본다. 한 아이가 공중에 난 구멍을 내려다본다. 새의 그림자 같은 검고 희미한 얼굴빛의 여자들 한 아이가 공중에 난 구멍으로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지구를 덮은 하늘에 수십여 개의 구멍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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