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임희숙 시인 / 수박씨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5.

임희숙 시인 / 수박씨

 

 

수박씨가 흩어진 풀꽃무늬 쟁반 위로

여름비가 내리고

우물처럼 깊어지는 풀꽃이

벌레가 두고 간 껍질과 짐승의 흰 터럭을 간지럽히는

 

어느덧 쟁반 속 풀꽃은 시들어

우물이 마르고 눈이 내리고

어긋난 무릎의 각질이 우물 속에 쌓이는 동안

다시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수박씨는 무덤처럼 부풀어

잘 발효된 수액이 붉은 홍수처럼 널브려졌다

 

다행히 빙하기는 오지 않았고

창세기는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온갖 풀꽃들과 짐승들을 키워낸 시간이

작은 씨앗의 방패를 뚫고 들어가는

이제 수박씨가 우물을 삼키는 시간

다시 우물이 수박을 키워내는 시간

누구나 한 생은 그렇게 시작된다

 

 


 

 

임희숙 시인 / 니스, 푸른 비둘기

 

 

비둘기 한 마리

에소프레소, 깊이 잠든 커피나무를 깨우는구나

부리로 길어낸 열매를 탁자보에 문지르다가

문득 나무 가지에 널어놓은 푸른 깃털

 

나의 고양이 블루

언제부터 니스의 카페 거리를 떠돌았느냐

부엌 유리창 비 듣는 소리에 하염없더니

털 빠진 담요와 누추한 손바닥에 살갑더니

다리 둘을 감추고 문득 재가 되었구나

 

탁자에 널린 하얀 피륙 너머

기억하느냐

빨래를 널던 내 등짝에 훌쩍 뛰어올라 장난질 하던

놀이터가 보이던 베란다를 아느냐

너는 몇 겁을 건너

고양이의 혀를 버리고 여기로 와 비둘기가 되었는가

 

아득한 시간을 건너 온 우리는

에소프레소, 뿌리를 버린 나무 앞에서

반려의 옛 맹세를 버린다 비로소

니스의 푸른 자갈밭에서는 이별이 제격이라고

나는 아직 사람의 네 발로

너는 비둘기의 두 다리로

 

 


 

임희숙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91년 《시대문학》으로 등단. 명지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 . 시집으로 『격포에 비 내리다』(하늘연못,1999년), 『나무 안에 잠든 명자씨』(시안, 2011년)과 그 외 『황홀- 그림과 시에 사로잡히다』가 있음.